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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지하철 추락사건 2005.05.19

by kaonic 2007. 4. 1.
간만에 버스를 배반하고 지하철을 선택한 날.

동대문운동장에서 급한 볼일이 생겨 잠시 들렀다가 열차를 기다리며, 공생충의 대단원을 읽고 있었다. 우에하라가 자신을 조종하려던 인터바이오 무리를 이페리트를 이용해서 해치우는 장면을 읽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무라카미 류의 잔인스런 표현에 약간 역겨워 하면서, 뻔히 들여다 보이는 결론을 나름대로 긴장감있게 읽어내려가던 중이였다. 이전에 읽었던 코인로커스 베이비가 떠오르며 다투라로 인한 대량 학살을 생각하며 그 연관성과 흐름의 비슷함에 대해서 머릿속에서 비교하고 있을 때, 일이 벌어졌다.

밝은 불빛을 내쏘며 열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왼쪽 시야 한 컨에서 여자가 흐늘거리며 들어왔다. 흔들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던 여자는 마치 인형처럼 늘어지며 승강장의 안전선을 지나쳐 곧바로 추락해 버렸다. 여자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철로에 떨어진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놀란 사람들과 나는 몇일 전 어떤이가 지하철에서 추락했을 때처럼 들어오는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댔다. 모습만으로는 마치 열차를 환영이라도 하는 듯해보였지만 어쨌든 멈추라는 의미의 손짓을 해댔다. 곧이어 열차가 멈추었다.

나는 한손에 책을 한쪽엔 가방과 겉옷을 들고 있었기에 엉거추춤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여자가 떨어진 곳은 가까운 곳였다. 나서기 싫어하는 내가 나서야 하는걸까. 생각하며 서서히 다가갔다. 추락하려면 좀 멀리서 하면 어떠냐라는 생각과 함께 저길 뛰어내려가서 여자를 붙잡아 끌어올리면 옷에 기름때가 묻겠지라는 다분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며 다가가는 중 나보다 조금더 가까이 서있던, 남자가 철로로 뛰어 내렸다. 남자가 여자를 건드리자 그때서야 정신이 차려졌는지 여자는 다급히 몸을 웅크리며, 철로의 안전대피공간으로 몸을 굴렸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긴 했나보다.

어쨌든 직접 철로로 뛰어 내릴 필요가 없어졌음에 기뻐하며, 그 남자를 도와 여자의 팔을 붙잡고 승강장으로 끌어올렸다. 여자는 여기저기 기름 때가 묻었으며, 코피를 쏟고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듯 멍한 눈빛은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수조차 없었다. 끌어올려놓고 일단은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이기에 나는 둘러쌓이는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뚫고 멀리 물러나서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여자의 팔을 잡아 끌어올릴때 뭔가가 손에 묻어 있었는지 책을 펼치려고 손을 대면서 책페이지에 갈색의 얼룩이 생겨버렸다. 책에 얼룩이 묻는 것은 정말 기분나쁜 일이다. 그다지 대수로울 것도 책을 읽는데에 아무런 지장도 없을지언정 책에 얼룩이 지거나 찟어지거나 꾸겨지는 일에 대해 기분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연되는 열차가 언제쯤 출발하게 될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는 사람들에 둘러쌓여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며 멍하니 서있었다. 상황이 안정되어가는 듯 싶어 계속 책을 읽었다. 열차는 10분가량 지연되어 출발했다. 열차에 오른 이후에도 여자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여자에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술이 많이 취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여자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술냄새가 나지 않으니 술은 안먹은 것이라 했다. 동료가 있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동료는 어디에 갔는가. 혹시 직접 뛰어내린 것은 아니냐는 대화가 오고가기 시작할 즈음. 관심을 끄고, 우에하라가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을 읽기 시작했고, 열차는 성신여대입구역을 지나고 있었다.


(대략 5월 19일 목요일 00시 10분 경에 발생한 일이다. 시간은 흐르고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논픽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