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 상자

너는 필자냐? 나는 팔자다. - 글을 쓸 때 조금만 더 생각해 봅시다.

by kaonic 2007. 6. 13.
앞에 붙은 제목은 그냥 말장난입니다. 불특정 다수에 속하는 당신은 글을 쓸 때, 자신을 가리키는 단어로 "필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필자라는 말은 대체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해석을 보자면, 글을 쓴 사람이나, 글을 쓰고 있거나 쓸 사람이 바로 필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작문의 주체가 바로 필자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글 속에 포함된 필자라고 하는 단어는 객관적 견지에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라는 단어는 자신이 아닌 제3자를 가리키는 속성이 강합니다. 글을 쓴 사람이 해당 글 속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필자라고 하는 것을 읽으면 느낌이 이상해지는 것이 이런 이유입니다.

주관적인 생각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나 자신이 꾸며낸 허구를 써내려가는 것이 글입니다. 타인의 생각을 쓰는 건 글을 쓴다기보다 받아쓰기거나 필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필자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객관적인 견지 속에 자신을 숨기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연구논문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연구논문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연구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나는 별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연구자라는 권위 속에 자신을 숨기고 책임을 회피하는 셈이 됩니다. 그것이 설령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연구자라는 객관적인 권위를 담은 단어는 심리적인 방패가 되어주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블로그를 운영하며,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자라는 표현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유명 블로거의 글을 보고, 잘못된 신문의 글을 보고, 생각 없는 잡지의 글을 보고 필자라는 단어를 학습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깊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으로 학습 된 글쓰기의 표현이 퍼져 나가 이제는 너도나도 글을 쓰면서 자신을 지칭할 때 권위 속에 숨기 편리한 필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필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자신의 글이 객관성을 띌 수 있다는 편견은 버려야 합니다. 필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자신이 뭔가 대단한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저 자기위안입니다. 문법적으로도 추천할 만한 것도 아니고요. 실제로 좋을 글을 쓰는 기고가들은 필자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쓰는 글이 대단히 잘 쓴 글도 아니고, 사람들의 귀감을 살 만한 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도 그저 생각을 쓰고, 이야기를 쓰는 블로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글을 쓰다가 자신을 지칭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는 많습니다. 문맥에 따라 알맞게 골라 쓰면 됩니다. 이처럼 존댓말로 글을 쓰는 경우에는 "저는"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보통의 글 속에서는 내가, 나, 자신 등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를 골라 쓰면 됩니다. 괜히 필자는 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권위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이 책을 쓴 필자는 팔자가 폈다."라고 말하면,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될까요? 아마 열이면 열, 뭔가 다른 글을 쓴 사람을 지칭해서 팔자가 폈다고 하나 보군.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 책을 쓴 본인은 팔자가 폈다." 라고 하면 어떨까요? 느낌 묘하죠? 이 책을 쓴 본인. 하면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책을 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지 애매합니다. 어쨌든 자신이라는 느낌도 있고, 타인이라는 느낌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본인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라고 말하진 않지만 말은 되니까요. 필자라는 단어도 이와 같습니다. "필자의 생각은 이러합니다."와 "저의 생각은 이러합니다."에서 오는 느낌을 비교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겠지요.

다시 한 번 비교해보자면, "이 책을 쓴 필자는 팔자가 폈다."와 "이 책을 쓴 저자는 팔자가 폈다."는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져도, "이 책을 쓴 필자는 팔자가 폈다."와 "이 책을 쓴 나는 팔자가 폈다."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필자는 A라는 글을 쓴 필자의 생각을 이렇게 분석했다. 필자는 ABC해서 DEF한 느낌으로 GHI를 표현해 냈다."라는 문장은 어떤 느낌이 들까요. 말은 되지만, 뭐가 뭔지 구분이 안 갑니다. 문장의 첫 대명사만 바꿔서 "나는 A라는 글을 쓴 필자의 생각을 이렇게 분석했다. 필자는 ABC해서 DEF한 느낌으로 GHI를 표현해 냈다."라고 해야 하지 옳지 않을까요? (비꼬아서 "필자는 A라는 글을 쓴 저자의 생각을 이렇게 분석했다. 저자는 ABC해서 DEF한 느낌으로 GHI를 표현해 냈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느냐? 라고 한다면 할 말 없습니다.)

저는 글을 쓸 때 자신을 가리키는 단어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가 쓰는 글이고, 나의 생각이 표출되는 것인데, 굳이 글 속에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를 포함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이런 경우에 자신을 가리킬 때 '저'를 사용하지 않고 '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어머니께 "할머니께서 밥을 잘 챙겨드시라고 하셨어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 입니다. "할머니께서 밥을 잘 챙겨먹으라고 하셨어요."가 맞는 말이겠죠. 즉, 할머니의 말을 전달하며, 어머니를 높일 필요가 없듯이 자신에게 나를 낮출 필요는 없습니다. 소심해서 지적나올까봐 적어봤습니다. 별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블로그를 하고 싶고, 쓰고 싶기 때문에 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구와 함께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블로그를 이용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제대로 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제가 글을 쓰면서 표현하는 모든 방법이 전부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도 사람인 이상, 지속적으로 글과 언어를 학습하고 있지 않는 이상, 분명 수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겠지요. 그럼에도 눈에 띄는 확실한 오류는 조금씩 고쳐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런 글을 적어봤습니다. 절대로 강요는 아니고 단지 저의 생각(소심소심)입니다. 사실 아침부터 들리는 블로그마다 "필자"라는 단어를 보게 되고, 결국 짜증이 난 때문에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이지만, 이런 건 끝까지 읽은 분만 알게 되겠지요. 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