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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습작

눈을 가지기 위해서

by kaonic 2007. 4. 3.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기 위해서. 아니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그의 눈을 후벼팠다. 눈이 있던 자리의 텅빈 공간에서 노려보듯 빨간 액체가 솟구쳤다. 감각이 차단된 그는 꿈쩍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아직 파이지 않은 눈이 천정의 형광등 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다. 의식없는 눈의 동공은 활짝 열려 있었다. 들고 있던 눈알에 이어진 신경과 근육다발이 하늘거리며 흔들린다. 핏방울이 시트로 떨어지며, 빨갛게 퍼져 나간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눈알을 들여다 보았다. 반쯤 충혈된데다가 뽑아낼 때 묻은 피로 얼룩져 있는 그의 눈은 생각보다 크고, 징그러워보였다. 상상하던 동그란 구슬모양이 아니였기에 약간 실망했다.

  크게 한숨을 쉬고 미리 준비해둔 생리식염수를 뿌려 눈알에 묻어있는 피를 닦아 냈다. 그의 눈알에 묻어있던 불순물이 씻겨내려가자. 눈알이 구슬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반짝이는 눈알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가방을 뒤져 포르말린액이 가득담긴 투명한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자 역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병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눌러 비벼주니 한결 나아진듯 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시트는 머리부분만 빨갛게 젖어 있었다. 생각보다 피가 적게 나온 것 같았다. 언젠가 그와 함께 봤던 호러영화가 떠올랐다. 금방 죽어버릴 조연 중 한명이 살인마에게 눈알을 뽑혔다. 그 영화에서는 피가 엄청나게 쏟아져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으며, 고통에 가득찬 표정으로 몸부림쳐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는 다정하게 미소짓고 있는 듯 했다. 그의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으며, 피는 어느새 멈춰있었다. 눈알이 뽑힌 자리에 피가 고여서 검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곧 마취에서 풀려나면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그 고통은 나의 선물이야. 영원히 잊지 마. 어짜피 잊을 수도 없겠지만...'

  그녀는 피식 웃었다. 포르말린액 위로 눈알을 신경과 근육다발부터 천천히 담궜다. 그녀는 병뚜껑을 덮고, 압축기로 공기를 빼내어 찰랑한 윗부분을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가방에서 레이블지를 꺼내 유성팬으로 이름과 날짜를 적어 넣었다. 그녀는 레이블을 떼어서 병 한가운데에 잘 붙이고 얼굴가득 미소를 지으며 살짝 입을 맞추었다.

  배가 고파왔다. 냉장고 문을 열었으나 딱히 먹을만한 인스탄트 식품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직접 요리해 먹는 것을 좋아했다. 인스탄트 식품은 사다 놓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엄지손톱을 깨물며 생각해 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냉장고의 식료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생각나는 요리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에그 스크램블을 해먹기로 했다. 프라이팬을 찾아 가스렌지 위에 올리고, 휘저은 계란을 붓는다. 계란이 적당히 익을 때까지 그저 휘저어 주기만 하면 끝이다. 후추가루를 찾아 조금 뿌리고, 가는 소금을 살짝 뿌려 섞어준다. 그녀는 가스렌지 앞에 서서 커피 한잔과 함께,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에그 스크램블을 깨끗이 먹어 치웠다.

  가방을 챙겨들고 병을 옆구리에 낀 채 그의 집을 나섰다.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올리고 턱을 살짝 끌어당기며 기운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입가에 번지는 환한 미소와 함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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