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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속으로 - 미시적 관점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의 거시적 통찰

by kaonic 2009. 9. 30.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잠시 긴장된 평화가 찾아왔다. 1920년대 제국주의의 막바지 흐름을 타고 문명의 발자취가 세상으로 퍼져나가 세계는 모험의 시대가 끝나가고 산업과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쥘 베른을 앞세운 지구 탐험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휴고 건스백(Hugo Gernsback)에 의해 사이언티픽션(Scientifiction)으로 공식화된 SF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SF세상은 하나의 장르로 분화되어 현상적 과학론과 함께 지구 밖으로, 그리고 은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장르적 독립의 시기가 개막되었다.

  SF의 모험이 우주와 시간으로 발을 넓히기 시작하는 와중 레이 커밍스는 작은 것에 집중했다. 18~9세기를 살다간 영국의 성직자이자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브루스터(David Brewster)경은 ”하나 이상의 세계(More Worlds Then One)"라는 책을 통해 현미경에 의해 드러난 보이지 않는 영역에 주목할 것을 촉구하고, 이를 근거로 신은 우리로서는 몰랐던 생명 형태들에 줄곧 주의를 기울여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 레이 커밍스는 여기에서 거론한 크기의 상대성에 주목했다. 작디작은 것. 무한에 가까운 축소를 통해 반지 속으로 고전적인 모험을 떠난 것이다. 장르적으로 정의한다면 마이크로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영화를 통해 익히 알려진 “마이크로 결사대(Fantastic Voyage)”와 비견될 만하다. 물론 훨씬 이른 시기에 더더욱 작은 개별적인 미지의 세계를 담았다는 점에서 “반지 속으로(Girl in the Golden Atom)”가 훨씬 적극적이지만 말이다.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되던 1922년,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당시 사회주의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유행과도 같이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뜬금없지만, 한국은 일제강점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3.1운동 후의 모단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퇴폐적, 감상적 색조의 낭만주의와 이를 극복한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아직 조선작가의 과학소설(1929년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가 발표된다.)은 등장하지 못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1913년에 발표되었으며, 이를 통해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이전의 모형들과 달리 양자이론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현대적인 원자 모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보어의 원자 모형이 레이 커밍스의 “반지 속으로"에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보어의 원자 모형을 살펴보면, 크기를 줄여 원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원자와 원자 사이의 공간뿐만이 아니라 주변을 도는 전자를 피해 드넓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태양계와 비슷한 일종의 행성계를-엄청나게 빠른 공전궤도 사이를- 지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만약 원자보다 큰 상태로 접근하게 되면 전자에 부딪쳐 원자의 세계는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작아지는 도중 세상 어디에나 퍼져있는 미생물과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공기 또한 입자일진데 인간이 원자 수준보다 작아지면 숨은 어떻게 쉴 수 있나. 등을 생각하면 과도하게 말이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스페이스 오페라가 그렇듯 레이 커밍스는 물리학적 사실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야기를 구성했다. 고로, 과학적 사실은 무시하는 센스를 발휘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런 건 하드SF를 읽을 때나 써먹길. 모험, 우정, 사랑, 그리고 상상에 집중하라.

  무한히 작은 것에 집착한 화학자는 특수한 현미경을 통해 어머니의 결혼반지에 나있는 흠집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한다. 무한한 우주공간 어딘가에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무한히 작은 공간 속으로 집약된 것이다. 이러한 이너 스페이스로의 집착은 세계를 미시적으로 바라보는 결과를 낳는다. 로저스가 반지 속의 세계에서 접하게 된 문명은 지극히 평면적인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대지와 온화하기 그지없는 기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오로이드족은 탐구심도 없으며, 모험에 대한 욕망도 없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함께 이루며 살아간다. 남녀 간의 차별도 존재치 않는다. 오히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더욱 높다. 사회주의의 이상적인 모습과 닮아 있다. 그들은 모자람 없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자본주의적인 요소는 배제된 채 평온하게 질서를 만들어가며 살아왔다. 평면적인 이상향 그대로의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닥친 위기는 세계의 반대편에서 살고 있던 호전적인 멀리트족의 침략이다. 하지만, 멀리트족은 반지 바깥에서 개입한 로저스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학살당한다. 화학자 로저스의 절대적인 힘이 오로이드족에게 먼저 개입했기 때문이다. 걸리버에게 제압당한 어느 소인국처럼 말이다. 이로써 그들 세계에 새로운 힘에 대한 미지의 공포와 함께 분노가 생겨나고 만다. 이를 통해 순진한 독자 문명에 대한 절대적인 힘의 개입이 어떠한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지 확실하게 각인시켜준다. 멀리트족을 학살하고 반지 속을 떠났던 화학자는 소녀를 찾아 다시 반지 속으로 돌아온다. 결국 소녀와 결혼을 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살아간다. 10여년의 세월동안 화학자는 오로이드족의 마스터로써 행세하며 지낸다. 화학자는 이러한 대우가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믿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그것은 공포 때문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오로이드족에게 오랫동안 잠재되었던 절대적인 힘에 대한 거부감은 세월이 흘러 화학자의 친구들이 반지 속으로 찾아오면서 더욱 커지게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에 압도되던 억압이 반군 지도자 타르고의 등장으로 인해 거친 반발로 드러나면서 오로이드족은 화학자와 그의 일행에게 적극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결국 절대적인 힘이 오로이드족을 학살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러한 소수가 지닌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힘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분노에 가득한 오로이드족은 상황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몰고 간다. 결과적으로 화학자 일행의 방문은 순수했던 오로이드족에게는 없었던 공포, 증오, 죄악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물론 모험소설의 기본적 가치인 “주요 인물은 끝까지 살아남아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지켜진다. 사실 외적인 요소를 전부 걷어내고 나면, 통속모험소설의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화학자 로저스가 모험을 떠나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고, 소녀의 종족을 도와 전쟁을 치루고 승리를 이끈다. 이후 소녀와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잘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화학자의 친구들이 찾아오고, 또다시 새로운 모험이 펼쳐진다. 결국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모험의 땅을 벗어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사랑, 우정, 가족애에 기반을 둔 보편적 가치 속에서 펼쳐지는 단순한 모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앞서 살펴봤듯이 그 속에 문명과 힘에 대한 관계의 고찰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화학자인 로저스는 무한히 큰 것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무한히 작은 것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생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현미경보다 훨씬 강력한 배율을 지닌 현미경을 개발했다. 그 첫 관찰 대상으로 어머니의 결혼반지를 선택해, 반지의 작은 흠을 무한히 확대한 결과 원자 속에 담겨진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한다. 그 속에서 인간과 닮은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한 화학자는 미지의 소녀에게 반한다. 소녀에게 점점 빠져들던 화학자는 너무 오랫동안 소녀를 관찰하는 바람에 현미경을 망가트리고 만다. 유럽은 한창 전쟁중이였기에 현미경을 새로 만들 수도 없는 상황, 화학자는 결국 몸을 줄여서 반지 안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고, 몸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약을 발명해 낸다. 친구들에게 반지를 관찰하도록 맡기고, 반지 속으로 여행을 떠난 화학자는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원자 속의 세계에 도달해 미지의 소녀 릴다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고 만다.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대지와 온화하기 그지없는 기후 덕에 그곳의 오로이드족은 평온하게 살아왔다. 덕분에 부드럽고 상냥한 본성만을 키우며 살아왔던 것이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어느 날 갑작스런 일이 발생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멀리트족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기가 흐르다가 화학자가 원자 속세계에 나타났을 즈음,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몸의 크기를 키운 로저스에 의해 멀리트족과의 전쟁은 오로이드족의 압승으로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반지 밖으로 돌아온 화학자 로저스는 그의 친구들에게 안부를 남기고 소녀를 찾아 반지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5년의 세월이 흐른다. 화학자가 남겨둔 편지를 따라 세 명의 친구들이 반지 속으로 여행하면서 새로운 모험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