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자포자기 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버린다. 근래들어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하고,
추적거리는 빗방울을 아련하게 느끼며 잠들고 후두둑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 깨어났다.
멍한 눈을 부비고 머리에 물을 끼얹어 잠을 쫓았다.
타일 바닥을 따라 하수구로 흘러가는 물의 반짝임이 묘하게 관능적이다.
거대한,
아주 거대한 우산을 펼쳐들고 하늘을 온통 막아버릴 듯한 기세로 집을 나섰지만
신발 끝에서 새어들어오는 빗물이 한기를 던지며 온 몸을 움추리게 만든다.
조용한 월요일의 사무실에 들어와 홀로 가득한 공간을 음미하며 가루커피를 한 사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간으로 변모한 월요일의 사무실이 좋다.
스스로,
그렇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며 오늘 할 일을 생각해 보지만,
없다.
스스로,
만들내는 일이 가득한 이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범죄와도 같지만 귀찮다. 일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권한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헷갈린다. 일을 구성하고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 결정하고 적당한 회의를 하고 밀어붙이면 좋으련만, 이 환경에서는 실행시점은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백만스물한시간의 회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싫다. 그래서 당분간 일을 만들어내지 않기로 했다. 얼마전 시작한 단편영화의 CGI작업이 떠올라 프로젝트를 열었지만 손이가지 않는다. 한 시간이 넘게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손을 움직이자고 다짐했건만, 폴리곤 하나 더 그려넣고 컴포지트 옵션을 하나 바꿔놓은 것이 고작이다. 느긋하게 마음먹기로 하고, 구독하고 있는 RSS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는 멎고 하늘은 조금씩 개어간다.
문득,
내일의 과제가 생각났다. 논문 및 학술지 데이타 베이스를 뒤적여보니 어떤 걸 써도 식상한 기분이 들고, 어떤 걸 생각해도 먼저 그것에 대해 기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세상 참 새로울 것이 없구나 싶어 약간 실망했다. 개념을 만들어낸다는 것. 참 어렵구나. 워드프로세서를 열고 적어둔 것을 살펴보니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 높게 잡은 것이 아닌가 싶어 퍼뜩 겁이 났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서는 이정도는 할 수 있을거라고 스스로를 토닥이고 있다. 인생에 소흘해진다는 것은 기분좋게 마음을 두고 즐기던 것을 더 이상 안 하게 되었을 때를 말하지 않나 싶다. 사진도 글도 거의 쓰고 있지 않는 요즘 정말 게을러진 기분이다. 그럼에도 온 몸이 바쁘고, 온 정신이 산만하다. 아후. 대학원엔 왜? 들어가서 비싼 학비내가며 이렇게 고생을 하나 싶기도 하고, 마냥 게으름만 피우다가 평지도 못 걷고 늪 속에서 허우적댈 것만 같다.
정신차려.
'이야기 상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해 볼 거리 - 천안함 침몰...... (0) | 2010.04.23 |
---|---|
사진숙제 전시회가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립니다. (6) | 2009.11.26 |
사진따위 하나도 없는 GMF 후기 (1) | 2009.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