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초록빛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초록빛은 초록빛일 뿐이잖아. 라고 말하면 바보같은가?"
한여름의 햇살이 강렬했던 오후 푸른 나뭇잎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밝은 빛이 흘러들어오는 창을 보니 실내는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턱을 괴고, 조금쯤 우울한 표정이 지으며, 차수저를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고 있었다.
"에어컨이 너무 세네요."
"응. 좀 춥네."
빠알간 토끼아가씨의 뒷쪽을 바라보니 멍한 그림자들이 서성이고 있다가 이내 흐트러져 갔다. 빨간 여인들이 춤을 추고 있다. 알 수 없는 리듬에 맞춰 흔들거리며 그림자들을 흐트린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얼그레이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대화도 안되는군요."
"그런가..."
"네. 평상시 같지 않아요. 이렇게 에어컨이 세서 추운데도 당신 땀을 흘리고 있어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도대체 왜 나를 불러낸거예요?"
"글쎄... 혼자 멍하니 있으려니 생각나서."
"치이..."
창문을 보았다. 사람의 키보다 더 높이 좁게 뚫려있는 창밖으로 덩쿨의 잎들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온통 덩쿨에 휩쌓인 느낌이 들었다.
"아까... 초록빛이야기 말야. 지금 생각이 든건데 웬지 그 안에 갇혀있는 것 같아. 창문마다 온통 덩쿨의 초록빛이 하늘거리고 있어."
"흥 몰라요."
"어이... 이봐. 삐진거야?"
"몰라요. 전 이제 가볼거예요. 저녁약속이 생각났어요."
"그래..."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볼을 잔뜩 부풀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잡아주길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찍 나가봤자 저녁약속에 가려면 시간이 한참 남을테니... 하지만 잡지 않는다. 이렇게 불러내고 화나게 만든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빠알간 토끼아가씨의 등뒤로 손을 들어올리고 살짝 흔들었다. 한 쪽에서는 아직도 아른거리는 그림자들이 빨간 여인들을 피해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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