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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고 김수영 시인의 자취에서 나를 찾다.

by kaonic 2008. 6. 17.
창작과 비평 2008년 여름호,

장르문학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수록된 것이 마음에 들어 오랫만에 집어든 문예지 속에는 김수영 시인의 40주기에 부쳐 그의 미발표 유고 중 김수영 전집에 수록된 부분과 미수록된 부분등을 포함해 일부가 담겨 있었다. 찬찬히 읽다가 심히 공감되 멍해지는 글을 발견, 1954년 11월 27일에 기록된 일기와 시를 발췌해왔다. 지금의 내 상황과 내 머릿속의 복잡함이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으니, 역시 세상은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가는 것과 고뇌가 비슷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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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느끼기도 싫은 내 마음에 사람들은 아예 돌을 던져주지 말았으면 하고 나는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아서 기도라고 하고 싶어졌다.

쓰라린 아침이었다.

어머니!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나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나의 목숨은 저 풀 끝에 붙은 이슬방울보다도 더 가벼운 것입니다.
나에게 제발 생명의 위협이 되는 말을 하지 마세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도 나는 돈을 벌어야 할 줄 알고
나의 살림이 어머니와는 떨어져서 독립을 해야하겠다는 것도 알고
나의 길을 씩씩하게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나에게
더이상 괴로움을 주지 마세요.

어머니가 무엇이라 나에게 괴로운 말씀을 하여도 아예 바보같이 화내지 않기로 마음먹은 나에게
제발 모른 척하고 있어주세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상태를 비참하다고도 보지 마시고
걱정도 하지 마시고 간섭도 하지 마시고 그냥 두세요.
애정이라 해도 그것이 괴로운 나는 지금 내가 얼마큼 타락하였는지 그 깊이를 나도 모를 만큼
한정없이 가로 앉아버렸습니다.


  (여기서 부터는 꽃이라 이름지어져 미발표 시로 분류되었으나 원래는 위의 문장과 함께 작성된 부분이다. 나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하여, 함께 붙여두었다.)

정말 내 이름을 부르지 마시고
나를 찾지 마세요

모-든 작의(作意)와 의지가 수포로 돌아가는 속에 나는 삽니다

나의 허탈하고 황막한 생활에도 한 떨기 꽃이 있다면
어머니
나에게도 정말 꽃이 있습니까

손을 대어서는 아니되는 꽃
결코 아무나 손을 대어서는 아니되는
이 꽃
확실한 현실이여

내가 대결하고 있는 것은 나의 그림자
인생의 해탈을 하지 못하고도
맑게만 살려는 데에 나의 오해와
비극과 희극과
타락 이상의 질식이 있습니다

꽃 아닌 꽃이여
잔혹한 진행이여

벌써 나의 고장이 없어진 지 오래인
내가 다시 내 고장을 찾아야 할 때
나의 이성(理性)은 나의 피부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름을 버리고 몸을 떠난 지
오래인 나의 흔적을 다시는 찾지 마세요

이즈러진 진리여,
어머니시여.

(1954년 11월 27일  김수영 미발표 유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