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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것들/영화/드라마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이루어냈는가?

by kaonic 2007.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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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한 자제하고 있지만 전개상 스포일러 주의 !!

뒤늦게 극장을 찾은 나는 <친절한 금자씨>를 봐야 하는가? <웰컴 투 동막골>을 봐야 하는가? 하는 갈림길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매를 하기 위해 뒤적이면서 고민이 사라져버렸다. <웰컴 투 동막골>은 보고자하는 시간대에 이미 예매분이 매진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친절한 금자씨>가 선택될 수 밖에 없었다. 당일 아침 같이 보자 했던 친구는 피곤함에 절어 잠에 빠져있었다. 아아. 오랫만에 극장가를 찾는 내게 이게 웬 시련인가? 결국 곤히 자고있던 동생을 깨워 끌고 가다시피 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동생은 여름동안의 더위속에서 맹렬히 불태우느라 추욱 쳐져서 늘어진 치자 단무지 덩어리 같았다. "오랫만에 영화라도 보면서 기분전환하고 또 열심히 해야하지 않겠어?" 라고 살살 달래며 극장에 도착. 늘어진 동생을 끌고오느라 영화 시작 시간에서 5분이 늦었다. 여기서 나는 언제나 불만이였던 상영 시작전 광고에 감사했다. 광고를 하느라 아직 영화의 본편이 시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웰컴 투 동막골> 쪽으로 몰렸는지 자리가 꽤 많이 비어 있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뒷쪽에 몰려 앉아 있었다. 덕분에 앞에서 5번째 정가운데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극장마다 좋은 자리는 조금씩 달라지는데 영화를 보러간 용산 CGV 4관의 경우 5번째 줄의 정가운데가 명당자리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다. 시야에 꽉 차는 화면이 영화에 빠져들기 좋다. 옆에도 아무도 없고, 앞에도 아무도 없고, 아아~ 제대로 자리잡은 기분에 흐믓하게 영화의 시작을 기다렸다. 늦게 도착했음에도 광고 몇개와 영화관람시의 주의사항이 상영되면서 시간적 여유가 있어 편안한 자세를 갖추고 약간 기대하며 영화의 시작을 기다렸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의 완결. 물론 스토리가 이어지는 연결고리 같은건 존재치 않는다. 개별적 작품일 뿐이며, 단지 복수라는 공통 주제에 대한 각각의 해석이 존재할 뿐이다. 과연 복수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복수란 무엇인가?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직설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층구조의 세계를 표현하기위해 선택한 것이 뜻을 거스르는 우연과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만 가는 상황, 복수와 함께 잔혹함과 애통함, 그리고 자비로움을 공존시키는 것이였다. 줄여서 말하자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복수를 하는 당사자도 그렇게 잔인한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 원인의 제공자 또한 최악의 상황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써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원하는 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복수는 나의 것>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고 <친절한 금자씨>를 제작하기 위한 바탕이 되어준 <올드보이>에서 박찬욱 감독은 관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전작에 비해 월등히 발전한 미장센과 함께 스토리의 전개 또한 이전보다 확실하다. <올드보이>에서는 힘이 넘쳤으며, 관객을 끌고가는 방법을 증명하고 보여준 셈이다. <올드보이>는 일본영화에서 보이는 전개방식을 차용했으며, 우리 정서에 맞도록 잘 다듬었다고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는 최면술사, 친남매의 사랑, 과묵한 경호원 등이 그렇지 않을까 의심해보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본과 미국에서의 흥행배경은 그런 것이 아니였을까 싶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올드보이>에서 보여지는 연출과 미장센은 세계 시장의 입맛을 맞춘 것이였고,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쓸면서 흥행과 예술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전부 잡아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뭐 다 아는 이야기를 써봤는데 왜? 라고 한다면,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서 스토리의 연관성은 없었지만, 까메오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전부 이전 영화들의 캐릭터들이라서 문득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이렇게 서론만 잔뜩 써놓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공갈빵 처럼 본 내용은 아주 미비해질지도 몰라 겁이 나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있나. 떠오른거 써야지. 안그럼 카레라이스를 먹고 트림을 안한 것과 같이 불편하다. 매.우.

<친절한 금자씨> 제목처럼 아주 친절하다. 친절하게 나레이션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상황을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들도 설명하긴 하지만, 독특한 표현이 자주 등장해 즐거움을 배가시켜주고 있다. 중간 중간 나오는 나레이션은 <마법진 구루구루>를 연상케 만들어 쓸데없이 웃어버리게 만들었다. 웃기지 않아야 할 장면에서 <마법진 구루구루>의 나레이션이 생각나는 것이다. "용사는 실망했다." 라는 식의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는 뻔한 상황에서의 나레이션으로 약간의 부연 설명과 함께 재미를 배가시키는 방법이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진지한 장면에서도 나레이션 때문에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더블어 박찬욱 감독이 <마법진 구루구루>를 본 것일까? 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영화에 집중을 해야만 하는 시간에 생각이 약간 딴데로 흘러가 버려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친절한 금자씨>는 스토리라인으로써도 진정 친절하다 아니할 수 없다. 수수께끼란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가? 라는 것조차 감추려들지 않는다. 다만, 범인을 등장시키지 않을 뿐이다. 수수께끼는 없다. 조금씩 과거를 삽입하며 왜? 라는 의문을 하나씩 지우며, 금자의 계획을 따라갈 뿐이다. 이 얼마나 친절한 전개인가?

복수를 계획하고 행하는 금자씨는 친절하고, 자상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전혀 친절하지도, 부드럽지도 않다. 잔혹한 것이다. 결국 복수는 행해지는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행해진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그랬고, <올드보이>에서도 그랬다. 다만 주체와 대립. 그리고 상황이 보다 명확해졌으며, 인과적인 흐름을 잘 따라갈 뿐이고, 제 손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이야기가 진행되어가면서 대부분의 모든 것은 금자씨 손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컨트롤하며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금자씨는 스스로의 손으로 끝장내는 복수를 포기하고 만다. 결국 이미 죽어버린 백선생의 얼굴에 총을 들이대고 복수할 뿐이다. 죽은자에 대한 복수는 이전에 백선생의 부탁으로 금자를 납치하려던 일당을 죽일 때와는 다르다. 보호본능과 함께 분노를 쏟아부어 머리에 총구멍을 내놓는 행위는 복수가 아니다. 다만 보호본능과 분노일 뿐이다. 그렇게 보자면 복수라는 것이 보호본능과 분노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결국 그 대상의 모호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치밀한 복수의 결말은 백선생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는 있었지만, 제 손으로 해치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시신의 얼굴에 총알을 박아넣을 뿐이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백선생을 해치우고, 금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모여 케익을 나누어 먹는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다. 세상의 더러움을 덮고, 하얗고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케잌을 먹으며 가족들이 슬그머니 내미는 통장번호. 대중적 순수함의 상징(아이들의 순수함?)인 하얀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며, 길이 막힐까 걱정하는 피해자 가족들. 여기서 다시한번 묻는다. 복수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복수를 하는 것인가?

금자씨의 복수는 목적이 확실했고, 비록 계획이 수정된 상태로써의 성공이였지만, 마지막에 와서 힘을 잃어버리고 흔들린다. 목적이 상실되고, 누명은 벗어던진다.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벗어던진 것은 아니다. 백선생을 죽임으로써 모든 일은 완결되었지만, 자신에게 가해진 죄의 덫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완결지어졌을 뿐이다.

복수의 의미와 상관없이 현실은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200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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