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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나 그리고 상실 - 태엽 감는 새

by kaonic 2008. 7. 25.
  "머리가 벗겨지는 것에 대한 대응책은 없어요. 벗겨질 사람은 벗겨지고 벗겨질 때는 벗겨지죠. 그런 건 막을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왜 곧잘 머리 손질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둥 하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그 예로 신주쿠 역 근처에 가서 그 주변에 누워 있는 부랑자들을 봐요. 벗겨진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매일 클리닉이니 사순이니 하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 있다고 생각해요? 매일매일 무슨무슨 로션을 쓱쓱 바를 것 같아요? 그런 건 화장품 회사가 적당하게 지어내서 머리 숱이 적은 사람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상술일 뿐이에요."

  "그렇군" 하고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데 넌 어떻게 머리가 벗겨진 것에 대해서 그렇게 상세하게 알지?"

  "요즘 가발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거든요. 어차피 학교에도 가지 않고 한가하니까요. 앙케이트라든지 조사라든지 그런걸 하고 있어요. 그래서 대머리에 관해선 꽤 상세하죠.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렇군."

  "하지만" 하고 말하고 그녀는 담배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구두 밑창으로 밟아 껐다. "내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절대로 대머리란 말을 써서는 안되죠. 우리들은 '숱이 적으신 분'이라고 해야 하거든요. 대머리는 있잖아요. 차별 용어래요. 내가 한번은 농담으로 '두발이 부자유스러운 분'이라고 했다가 굉장히 야단맞았어요. 그런 걸로 장난치면 안된다고요. 모두 굉장히 진지하게 일하고 있죠. 알아요?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굉장히 진지하단 말예요."

  나는 주머니에서 레몬 사탕을 꺼내 하나 입에 넣곤 가사하라 메이에게도 권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 대신 담배를 또 꺼냈다.

  "저기요, 태엽 감는 새님" 하고 가사하라 메이가 말했다. "아저씨 지금 실직 상태죠?"

  "그래."

  "성실하게 일할 생각은 있나요?"

  "있지." 그러나 스스로가 한 말에 점점 자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모르겠어" 하고 나는 고쳐 말했다. "뭐랄까,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도 확실하게는 모르겠으니 잘 설명할 수가 없지만."

  가사하라 메이는 한동안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저기요, 태엽 감는 새님, 만일 괜찮다면 요다음에 나랑 같이 그 가발 회사에 아르바이트하러 가지 않겠어요? 그다지 보수가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편한 일이고 시간도 꽤 자유로워요.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얼마 동안 그런 식으로 임시 변통적인 일을 해보면, 여러 가지 것들이 더 알기 쉬워지지 않을까요? 기분 전환도 될테고요."

  그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나쁘진 않군" 하고 나는 말했다.

<태엽 감는 새> 1권 117~118페이지에서 발췌- 무라카미 하루키, 윤성원 옮김, 문학사상사


  문득 <태엽 감는 새>가 떠올랐다. 1997년 어느 겨울날의 깊은 밤, 수원산 꼭대기의 막사 침상에 엎드려 취침등의 희미한 빛 아래서 눈을 부비며 읽던 기억이 흐릿하다. 세월이 10년 넘게 흐르는 동안 잊혀졌던 세계가 살짝 고개를 든다. 다시 읽는 동안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해설로만 수긍했던 그 것들이 겹쳐지고 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버리지 않고 그 무게를 더해간다. 점점 어께가 무거워진다. 영영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뭐랄까,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도 확실하게는 모르겠으니 잘 설명할 수가 없지만."

  덧, <태엽 감는 새>를 쓰던 당시의 하루키는 정말 앞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분명 앞으로 머리가 벗겨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살아남았다. 이마가 조금 넓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건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어 언젠가는 대머리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