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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나름 새해, 나름 신년선물, 나름 잘 살고 있음.

by kaonic 2009. 1. 2.

새해가 밝아오면, 결심을 하게 되고, 결심을 하게 되면, 삼일이면 끝나게 되고, 그렇게 반복되는 일년을 보내며 나이를 먹어간다. 라는 건, 꼭 모두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아무튼 밝아온 새해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빛이다. 파아란 하늘 아래, 차가운 공기와 함께 바라보는 풍경은 색으로 가득하건만, 눈으로 들어와 필터를 거치면서 뇌세포로 전달된 풍경은 온갖 색이 흐트러지고 뒤섞여 회색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러고보니 회색분자라는 말이 있다. 소속이나 정치적 노선, 견해 등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뚜렷하지 않은 사람을 회색분자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 말이 줏대없는 놈 처럼 들릴 수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방향만 정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앞날의 길, 어떻게든 색을 되찾아 앞으로 나아가리라.


어제 아침 택배를 받았다. 원래는 작년 말일에 집에 도착한 것이지만, 어딘가에 묻혀있다가 내 손에 건네진 것이 2009년 1월 1일이었다. 발신지를 확인하니 오멜라스다. 잊고 있던 이벤트가 생각났다. 포장을 풀어보니 역시 올라프 스테플든의 "스타메이커"였다. 거친 표지, 적당한 무게감, 재활용 느낌의 표지는 웬지 환경을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러거나 말거나 좋은 인상이다. 녹색의 기하학 무늬가 눈을 어지럽힌다.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숙인 헐벗은 청년의 감은듯 뜬듯 알 수 없는 눈가가 우울하다. 내 책장의 안녕한듯 안녕하지 못한듯 얌전히 누워있던 책에 대한 이벤트 상품이다. 새해가 밝아오고 받았으니 신년 선물을 받았다 생각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오멜라스 여러분.


하루종일 자다깨다를 반복하던 1월 1일, 새벽에 잠이 안 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웬걸, 쿨쿨 잘 잤다. 아침 7시 30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최근 일어나던 시간대와 맞지 않아 더 자고 싶었으나, 30분을 뒹굴다가 벌떡 일어섰다. 커피를 갈아 내리고, 머리를 감았다. 맑아진 정신과 개운한 눈가, 산뜻해요. 따스한 커피를 마시다보니 배가 고파온다. 다른 집이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집은 모두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 선뜻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아 점심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간만의 이른 시간, 슬슬 끄적여보다가, 책을 좀 읽다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느리게 살아가는 건 참 좋다. 그래도 허둥대며 집을 나서고, 지겨워하며 일을 하고, 피곤에 쩔어 귀가하던 나날이 조금은 그립다.

이렇게 새해맞이를 실감했으며, 나름 신년선물을 받았으며, 나름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