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문학의 빅 쓰리라고 알려져 있으며, 유일하게 최근까지 생존해 있던 아서 클라크 경이 2008년 3월 18일 그의 거주지인 스리랑카(1954년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놀러갔다가 자연에 매료되어 그대로 눌러 앉았다.)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아서 클라크는 1960년 부터 소아마비 증세를 앓은 바 있으며, 최근 몇년 동안 휠체어에 의지할 만큼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100권이 넘는 SF관련 서적을 발표했는데, 그의 탁월한 식견과 과학적 예측은 시대를 앞서 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5년 영국의 "와이어리스 월드"에 게재한 소설' 외계로부터의 전달'에서 당시로는 상상치도 못했던 인공위성이라는 개념을 발표했는데, 이는 실제로 10년 뒤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개념을 묘사하면서 지구의 자전속도와 같은 속도를 갖는 정지위성까지 생각해냄으로써 정지위성 기술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것이다. 덕분에 고도 3만6천Km의 지구궤도를 클라크 궤도라고 불리운다.
이 외에도 인류가 1970년대에는 달에 발을 디딜 것이라고 1940년대에 예측하기도 했다. (무슨 노스트라다무스 설명같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또한 우리에게 친숙한 스텐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각본을 통해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아폴로 12호와 15호가 달착륙 임무를 수행할 당시에는 CBS에서 해설을 맡은 바 있다.
이후 '라이프 Life' 지 편집진들과 함께 <인간과 우주 Man and Space>를 제작했고, 미국 우주인들과 더불어 <달 위에 처음으로 First on the Moon>을 쓰는 등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는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그는 미국 우주계획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는데, NASA의 자문을 맡아 왔고, 의회 초청으로 관련 위원회에 전문가로 출석하기도 했다. 그 업적이 '타임 Time'지의 달정복 10주년 특집 호에 커버스토리로 소개되면서 '과학에 공헌이 큰 미래 학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77년에는 과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킨 데 대한 공로로 브래드포드 워시번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낙원의 샘"을 발표한 뒤, '쓸 것을 모두 썼다'며 단독 집필은 이제 하지 않겠다는 선언했으나, "3001: 마지막 오디세이"를 쓰며 그 말을 뒤집은 바 있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90세의 생일날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세 가지 소원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외계 생명체의 증거를 보고 싶다. 우주에서 우리만이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라고 항상 믿어 왔다. 인류는 외계인이 언젠가 신호를 보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외계인도 못 만나보고 타계하다니 죽을 때 얼마나 아쉬웠을까. 그래도 나이를 생각하면 오랫동안 건강히 살아온 셈이다. 혹시 죽어서 넋이라도 외계인을 만나고 있진 않으련지.
1917년 12월 16일, 영국의 서머싯주 마인헤드에서 출생. H.G.웰스 이후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과학소설(SF) 작가로 평가되며, 그의 활동범위도 우주 ·해양 ·전자공학 관계의 전문연구서, 텔레비전의 과학 프로그램, SF 영화의 제작 등 다방면에 이르고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21세기 전후를 무대로 한 현실감넘치는 작품, 《우주의 섬들》 《화성의 모래》 《지광(地光)》(1955) 《해저목장(海底牧場)》 등과, 먼 미래와 무한의 공간을 무대로 인류와 문명의 운명을 사색하는 작품, 즉 《유년기의 끝》 《도시와 별》 그리고 스텐리 큐브릭의 영화로도 유명한《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등이 그것이다. 그 작품의 공통점은 인류가 지닌 지성의 진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1954년에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스리랑카에 갔다가 자연경관에 매료되어 그대로 거주지를 옮긴 바있으며, 1998년에는 영국에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작위를 수여한 바 있다. 2008년 3월 18일 스리랑카에서 타계했다.
(흐린 글씨는 네이버에서 무단 발췌 후 멋대로 수정)
그는 생전에 100권이 넘는 SF관련 서적을 발표했는데, 그의 탁월한 식견과 과학적 예측은 시대를 앞서 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5년 영국의 "와이어리스 월드"에 게재한 소설' 외계로부터의 전달'에서 당시로는 상상치도 못했던 인공위성이라는 개념을 발표했는데, 이는 실제로 10년 뒤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개념을 묘사하면서 지구의 자전속도와 같은 속도를 갖는 정지위성까지 생각해냄으로써 정지위성 기술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것이다. 덕분에 고도 3만6천Km의 지구궤도를 클라크 궤도라고 불리운다.
이 외에도 인류가 1970년대에는 달에 발을 디딜 것이라고 1940년대에 예측하기도 했다. (무슨 노스트라다무스 설명같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또한 우리에게 친숙한 스텐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각본을 통해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아폴로 12호와 15호가 달착륙 임무를 수행할 당시에는 CBS에서 해설을 맡은 바 있다.
이후 '라이프 Life' 지 편집진들과 함께 <인간과 우주 Man and Space>를 제작했고, 미국 우주인들과 더불어 <달 위에 처음으로 First on the Moon>을 쓰는 등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는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그는 미국 우주계획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는데, NASA의 자문을 맡아 왔고, 의회 초청으로 관련 위원회에 전문가로 출석하기도 했다. 그 업적이 '타임 Time'지의 달정복 10주년 특집 호에 커버스토리로 소개되면서 '과학에 공헌이 큰 미래 학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77년에는 과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킨 데 대한 공로로 브래드포드 워시번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낙원의 샘"을 발표한 뒤, '쓸 것을 모두 썼다'며 단독 집필은 이제 하지 않겠다는 선언했으나, "3001: 마지막 오디세이"를 쓰며 그 말을 뒤집은 바 있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90세의 생일날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세 가지 소원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외계 생명체의 증거를 보고 싶다. 우주에서 우리만이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라고 항상 믿어 왔다. 인류는 외계인이 언젠가 신호를 보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외계인도 못 만나보고 타계하다니 죽을 때 얼마나 아쉬웠을까. 그래도 나이를 생각하면 오랫동안 건강히 살아온 셈이다. 혹시 죽어서 넋이라도 외계인을 만나고 있진 않으련지.
1917년 12월 16일, 영국의 서머싯주 마인헤드에서 출생. H.G.웰스 이후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과학소설(SF) 작가로 평가되며, 그의 활동범위도 우주 ·해양 ·전자공학 관계의 전문연구서, 텔레비전의 과학 프로그램, SF 영화의 제작 등 다방면에 이르고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21세기 전후를 무대로 한 현실감넘치는 작품, 《우주의 섬들》 《화성의 모래》 《지광(地光)》(1955) 《해저목장(海底牧場)》 등과, 먼 미래와 무한의 공간을 무대로 인류와 문명의 운명을 사색하는 작품, 즉 《유년기의 끝》 《도시와 별》 그리고 스텐리 큐브릭의 영화로도 유명한《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등이 그것이다. 그 작품의 공통점은 인류가 지닌 지성의 진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1954년에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스리랑카에 갔다가 자연경관에 매료되어 그대로 거주지를 옮긴 바있으며, 1998년에는 영국에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작위를 수여한 바 있다. 2008년 3월 18일 스리랑카에서 타계했다.
(흐린 글씨는 네이버에서 무단 발췌 후 멋대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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