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소속이 사라진 이후 자유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남들은 백수(꽤 집착하는 듯)로 바라보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고, 내 주변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세상은 흘러간다. 요 몇 일 간 새벽에 잠이 들고, 오후에 잠에서 깨어나는 이른바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세상과 점차 멀어져 가고 있었다. 오랫만의 자유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리고, 어리둥절 눈을 꿈뻑이며 그렇게 어찌할 바 없는 침잠으로 흐르는 듯 하다. 해야 할 일이 정해지고, 무언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에 바로 사회에 속해 자신이 세상 한 가운데서 작게나마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사회 생활이다. 그 테두리 바깥으로 흘러나온 지금은 역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스스로의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멍한 것일 줄이야.
잠에서 깨어 늦은 식사를 하고나니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보고픈 영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닌지라 극장 앞에 가면 무언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무턱대고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다. 선택의 고민을 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결국 그녀의 선택으로 광화문 스펀지 하우스로 "식코"를 보러가기로 했다. 그래놓고 잠시 누워 있다가 다시 잠이 들다니 철저히 게을러지는 느낌에 기분이 조금 가라 앉았다.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어느덧 극장 안, 관객은 열명 정도 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지, 다큐멘터리 영화에 많은 관객이 들 일이 있을까. 별 생각없이 보기 시작한 "식코"는 흥미와 인식을 자유롭게 주물럭거리며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기 시작했다. 어쨋든 미국의 의료보험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들이 펼쳐지지만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비틀고 꼬아서 마이클 무어감독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사람을 선동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와중에 자신을 비방하던 안티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을 까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잊지 않는다. 무서운 사람 같으니라고.
결론은? 한국의 의료보험이 정말 좋다는 사실.
빈부의 차이와 직업의 유무를 떠나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전 국민이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사소한 감기 하나로도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잊을 만 하면 거론되는 의료보험 민영화는 잊을 수도 있어서도 아니될 일이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를 주도적으로 발달시켜온 미국.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그 모습이 서서히 우리의 현실에 맞닿는 것이 가슴 아프다. 이명박 정권이 탄생한 것도 이를 기반으로 한다. 자본가로써의 성공신화는 우리에게 수 많은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거기에 감화된 우리 우매한 국민들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우리가 발전시켜온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말 처럼, 자본가를 위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는 자본가를 더욱 배부르게 만들자는 구호와 일맥상통하는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서서히 심해지던 양극화는 이제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가속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하나 둘 거론되는 민영화의 바람 속에서 미래는 더욱 어두운 불안으로 잠식당하고 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소고기 협상 문제부터 시작해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하는 모든 정책적 현안들은 철저히 자본주의 시스템, 그것도 기업체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입각해 있다. 결과적으로 경제부흥을 말하는 것은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것일 뿐이며, 국민개개인에 대한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을 이끌던 리더쉽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모두 자본을 위해 운용한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 때문에 정부 조직조차 철저하게 기업 체계에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통령 하위에 존재하는 각각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위해 혈안되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개별 보고를 할 뿐 연관 부처에는 입다물고 있게 되는 결과가 나왔다. 왜? 기업에서는 실적이 당장 눈에 안 보이면 바로 불이익을 당하니까. 이명박이 원하던 기업조직화는 결국 각 부처간의 의사소통이 엉망이 된 원인이 된 셈이다.
그럼으로써 이명박 대통령 자신의 눈과 귀까지 막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부조직이 이래서야 국민과의 의사소통은 이미 저 멀리 떠나버린 셈이다. 그래서 소고기 협상에 대한 대국민 사과조차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겠지. 이명박 스스로는 자, 이쯤 했으니 사원들이 조용히 있겠지. 라고 생각했겠지만, 천만의 말씀. 국민들의 자생적인 촛불집회는 더더욱 열을 올리고 있으니, 상대하는 것이 사원이 아니고, 우매한 척 하다가 뒷통수 맞고 깨어나 눈에 불을 킨 국민이라는 것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국가를 운영하는 것과 기업체를 운영하는 것은 비교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다른 것이다.
이야기가 점점 커지고 있으니 이쯤에 멈추고, 영화가 끝나고 출출한 배를 달래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와보니 오늘도 역시 촛불집회가 슬그머니 시작되고 있었다. 평일의 예고되지 않은 지속성을 가진 집회인지라 그리 많은 사람이 나오진 않았지만, 적당히 붐비며 열성적으로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물론 오늘도 역시나 우왕좌왕 누군가는 시청으로 가자더니 결국 광화문 이순신 장군 앞에 버티어 섰다. 이런 저런 구호 속에서 오늘의 히트작인 "이명박을 미국으로 수출하자!"던 구호에는 슬그머니 웃음이 번졌다. 구호 속에서 누군가의 한마디 "수출하면 미국에서 받아줄까? 세관에서 걸려서 반송될거야."는 그야말로 커다란 웃음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했다. 어린 중고등학생들도 많이 보이고, 회사에서 퇴근해 술 한 잔 걸치고 온 아저씨들도, 길가던 노숙자들도, 아이를 데리고 나온 아줌마도, 동네 마실나온 듯 한 할아버지도, 남녀노소 모두가 한 마음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이다보면 안 좋은 꼴도 보이곤 하는데, 오늘같은 경우엔 술에 취해 나온 듯한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셋이 두각을 나타냈다. 빽빽히 차있는 사람들 한 가운데서 담배를 나눠피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옆에 서있던 지라,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담배연기는 어떻게 하냐고 말려도 보았지만, 결국 무시당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참고 있었지만, 이미 그 주변의 사람들은 담배연기를 피해 물러나 있었다. 좋은 의도로 모여서 큰 소리를 외치기 위해 합류한 것은 좋지만,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생각없이 그렇게 피해를 주는 건 정말 눈꼴시린 일이다.
6월 10일 대대적이 촛불집회가 예고되어 있으니 그날 함께 흥겹게 판을 벌리고 놀아보세. 불미스런 일 없이 즐겁게 주장하며 정치적 관심을 모으길 기대한다. 그날, 평화롭게 닭장차에 한 번 오르는 것도 좋겠지. 일명 닭장차 관광~! 인증사진 올리도록 노력해 보겠소이다.
'이야기 상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건소 금연클리닉에 참여하다. (2) | 2008.06.09 |
---|---|
실직신고서 (3) | 2008.05.30 |
커피라는 것, 제대로 맛보려 생각하면 매우 어렵다. (4) | 2008.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