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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실직신고서

by kaonic 2008.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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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가 되었다. 얼마만의 일인지 가물가물해서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백수였던 적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삼십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백수가 되었다.

한 없이 망설이던 시간 속에서 그렇게나 속상해하며 고민했던 결단이다. 서운하고 아쉬워서 서럽게 흐느낄 것 같아 두려웠었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홀가분하다. 앞으로 얼마나 백수로 지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대로 영영 취업전선에서 동떨어져 빌어먹고 살게 될까 두렵기도 하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진다.
 
그토록 괴로워하며 몸 상해가며 노력한 모든 것들이 허무하다. 결국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기댈 곳도 비빌 언덕도 없는 존재가 한 없이 가여울 따름이다. 스스로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차버렸다. 흐르는 인생을 처연하게 바라보지 않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알게모르게 회사에 가져다 둔 짐이 꽤 된다. 혼자서 옮길 수 있을까 걱정스럽긴 하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다. 몇 권의 책, 몇 개의 부품들 뿐인데 모아보니 한 짐이다. 컴퓨터에 남아있는 개인적인 자료들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준다. 쓸모 없을지도 모를 자료들이 한 가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두 복사해 두고 있다.

지난 번 회사가 문을 닫을 때는 바로 옮겨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음의 정리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와서 지나간 충격까지 모조리 다가와 뇌세포를 자극하고 있다. 움찔움찔 떠올랐다 사라지는 기억과 지나간 생각의 흔적들이 간지럽다. 지금까지 쫓아온 꿈은 대체 무엇이였을까?

꿈꾸며 살아가는 인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에 벌써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자며 키보드와 마우스로 달려드는 손가락은 어느새 취업정보 사이트를 뒤적이고 있다. 특별한 분야인 만큼 취업 정보사이트에서 찾아봤자 별다른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파일이 복사되는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진다. 쓸데 없는 자료까지 옮기고 있나보다.
 
어서 모든 개인 자료를 지워버리고 자리에서 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오랫만의 자유가 그렇게 어설픈 안절부절을 심어준 모양이다. 온갖 계획이 머릿속을 맴돈다. 여행? 휴식? 영화? 게임? 책? 잠? 등산? 그간 억눌린 욕구들이 아우성이다. 물론 머리 한 구석에서는 자기계발의 욕구가 꿈틀댄다. 어서 하나씩 달래줘야 겠다.

근데 실업급여는 나올까? 어떻게 받는건지 알아봐야 겠다.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

광우병 그리고 경제의 침몰 속에서 서태지는 돌아오고, 나는 서서히 가라 앉는다.

뭐, 느긋하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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