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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습작

어색해

by kaonic 2007. 3. 30.
어색해 죽겠네. 대체 뭐가 잘못된거지? 라는 생각을 잠깐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핑크빛 곰 아가씨가 앉아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어색한데요?"

아. 들렸나보다. 최근들어 머릿속의 생각이 가끔 입 밖으로 튀어나와 멀리 퍼져가는 신기한 병에 걸려버렸다. 상당히 골치아픈 병이다. 착한척 할 수도, 악한척 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꾸밀수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버려야 하는 것인가보다. 그래선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자포자기?" 핑크빛 곰 아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아니야. 자포자기라니 잘못 들었겠지. 그런데 왜그리 불편한 표정이지?"

"어색하다면서요? 아무래도 내가 앞에 앉아있어서 어색한가 싶어서요." 핑크빛 곰 아가씨가 미간을 쌀짝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그럴리가.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라고 둘러댔다.

"아! 4차원의 세계!" 핑크빛 곰 아가씨는 불편한 표정을 풀고, 뭔가 발견했다는 듯 손가락을 치켜들며 온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귀가 멍해져 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거야."

"나랑 있을 때 4차원으로 가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다른 사람과 있을 때엔 조심해야 겠는걸요."

"그렇지. 병일까?"

"병이예요."

"그래. 병인가보군. 아. 어딘가 가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담배연기가 들이마시고 싶어져 담배를 꺼내들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가 켜지질 않았다. 한숨을 크게 쉬고 창 밖을 보니 어느 덧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핑크빛 곰 아가씨가 조용히 일어나며 말했다. "가봐야해요. 하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걸요. 커피 한 잔 더 하시겠어요? 저는 한 잔 더 할건데. 아! 맞다. 지난번에 구워놓은 쿠키가 남아있어요. 몇일 안됐으니 눅눅해지진 않았을거예요."

핑크빛 곰 아가씨는 한결 좋은 표정이 되어, 나의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고, 부산하게 부엌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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