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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습작

변명

by kaonic 2007.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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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변명은 "그러니까" 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꼭 이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발바닥에 붙어있는 굳은 살 만큼이나 단단히 붙어버렸다. 지금, 빠알간 토끼 아가씨 앞에서 변명을 시작하려는 이 순간. 내 머릿속은 온통 새하얗게 변질되어 떠도는 반점하나 없이 깔끔하게 흰빛으로 가득차 버렸다.

뒷 말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입에서는 벌써 "그러니까..."라고 튀어나오고 있었다. 주워담으려 허공에 손짓을 해볼 틈도 없었다. 소리의 파동은 언제나 행동반응보다 앞서있다. 주워담으려 아무리 휘저어 봤자 파동을 왜곡시킬 뿐, 침잠시킬 수는 없다. 왜곡된 파동은 오히려 오해를 만들어 강력한 역파장으로 돌아오고 만다. 손짓은 무의미할 뿐이다. 빠알간 토끼 아가씨의 큰 눈은 더욱 빨개져서 나를 노려보고, 귀여운 볼은 입안에 사탕이라도 물고 있듯이 부어있었다. 결국 뒷말을 잇지 못한 채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계속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거예요?"
빠알간 토끼 아가씨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어께를 젖히고, 턱을 끌어당기며 건방진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드러내어진 그녀의 겨드랑이는 귀엽게 주름이 잡혀 있었고, 가슴은 내밀어져 있었다.

"글쎄..."

입 밖에 튀어나온 어설픈 한마디에 아차 싶었으나 소리는 이미 흘러가고 말았다. 빠알간 토끼 아가씨는 좀전보다 더욱 화가 치밀었는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변명을 하려다가 오히려 화만 돋궈 버렸다. 쓸데없는 참견이 일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일전에 빠알간 토끼 아가씨의 친구 C가 부탁한 일을 들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C는 빠알간 토끼 아가씨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언뜻 듣기에... 아니지, 귀기울여 듣기에도 그건 빠알간 토끼 아가씨의 상황을 개선시키는데에 도움이 될 듯 싶었다. 나는 잠시 고민할 틈도 없이 응낙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빠알간 토끼 아가씨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고, 결국 부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후회해봤자 소용 없다. 언제고 깊이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날이였다. 그리고 변명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빠알간 토끼 아가씨를 위해서 였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위선적이라 생각이 든 것이다. 어느새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 생각의 구름들이 흘러들기 시작했지만, 자가 모순에 빠져버린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빠알간 토끼 아가씨는 내가 앉아 있는 의자의 다리를 힘껏 걷어차 온 몸에 진동을 남겨두고, 뒤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변명은 하지 못했다.

일 주일 쯤 지나면, 빠알간 토끼 아가씨는 언제 화를 냈었느냐고 반문하듯 웃으며 나를 찾아올 것이다. 나는 살라미 소시지와 베이컨을 살짝 구워서 빵위에 얹고, 치즈와 양상치, 토마토와 피클을 올리고, 마요네즈를 뿌리고, 그 위에 빵을 덮어서 오렌지 쥬스와 함께 그녀에게 내밀 것이다. 빠알간 토끼 아가씨는 그것을 천천히 남김없이 먹어치울 것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잔의 커피를 타와 테이블에 올려 놓고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는 창밖을 바라볼 것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