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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것들/애니메이션

세계를 구하는 소년의 모험 - 스팀보이

by kaonic 2007.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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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은 1988년작 <아키라> 이후 규모가 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감독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궁물어>, <로봇카니발>, <메모리즈> 등의 옴니버스 작품과 <노인Z>(원작/각본), <스프리건>(총감독) 등을 통해 끊임없는 상상력과 함께 마이너적인 실험정신을 고스란히 발휘하여 사회의 모순을 표현해 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를 애니메이션의 명장 반열에 올려놓은 <아키라> 이후 16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발표한 <스팀보이>는 제작기간 9년, 총 제작비 24억엔, 총 작화 수 18만장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베니스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2004년 SICAF(서울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초청작으로 상영된 바 있으며, 2005년 8월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스팀보이>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산업화가 가속되던 19세기 산업시대의 선두에 서있는 영국 런던에서 실제로 개최된 최초의 만국 박람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는 16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영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이 정점에 이르는 시기였다.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의 등장 이후 산업용 기계의 개발이 가속화되고 자동화되기 시작했다.

공장제 수공업이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바뀌어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과학, 특히 증기의 힘에 매료되어 새로운 발명과 시도로 자연의 법칙을 넘어설 수 있으며, 부와 명예, 그리고 초강대국의 꿈을 실현시켜 삶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유난히 산업혁명 시대를 좋아하는 듯하다. 각종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영화, 소설 등에서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비교적 자주 만나볼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19세기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발 빠른 산업화를 이루어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써 발돋움하던, 이른바 잘나가던 희망의 시기에 대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서러운 과거의 경험과 함께, 현재로써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지만 말이다.

<스팀보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스케일과 함께 디테일이다. 엄청난 스케일과 세밀한 디테일의 질감은 시대적 배경을 잘 설명해 주며, 증기기관이 보여주는 클래식한 기계장치를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일러에서 내뿜는 세찬 증기와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톱니바퀴와 기계장치들의 표현은 증기기관의 힘차고 역동적인 기운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증기기관이 활발하게 이용되던 당시, 석유를 이용한 엔진이 새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전기를 이용한 시제품들이 하나둘 선보이기 시작했지만, 증기기관만큼 힘을 낼 수 없기에 전기나 석유의 힘이 증기기관을 대체할 수 없으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19세기 런던의 모습과 만국 박람회의 완벽한 재현은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준다. 이러한 배경의 사실적인 묘사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모순투성이의 과장된 기계를 현실로 끌어내는 듯하다.

이와 같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기술문명의 과장된 표현은 소설가 브루스 스털링과 윌리엄 깁슨이 공저로 1991년에 발표한 <차분기관 The Difference Engine>을 통해 대체역사로써 보여준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18~19세기의 산업시대적인 배경을 차용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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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의 상징인 제1회 런던 만국 박람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1866년의 영국. 맨체스터에 사는 소년 레이는 발명가인 할아버지 로이드와 아버지 에디의 영향으로 기계와 발명에 관심이 많은 13살 소년이다. 어느 날 미국에 연구차 떠나있던 할아버지로부터 소포가 배달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구지원을 해주는 미국 오하라 재단 사람들이 들이닥쳐 소포를 빼앗으려 한다.

소포 안에는 “절대 아무에게도 건네주지 말아라”는 할아버지의 편지와 함께 축구공 크기의 스팀볼이 들어있다. 이 스팀볼은 엄청난 스팀을 압축하고 있어 세상을 뒤바꿀만한 위력을 지닌 새로운 에너지원. 미국 오하라 재단의 후원으로 레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완성시킨 것이다. 로이드는 오하라 재단이 남모르게 살상용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각 나라에 판매하려는 속셈을 알아차리고 스팀볼을 빼돌려 손자에게 전하려 한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스팀볼을 되찾기 위해 모험을 시작하는 레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스팀보이>는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던 철학과 깊이 있는 내용은 완화되고 전체적인 스케일과 액션이 강화되어 스토리가 가벼워진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