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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습작14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들판을 가로지르는 냇가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두리번 거렸으나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몇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자 뒷목이 뻐근한 느낌에 목을 돌리다가 그 녀석을 발견했다. 녀석은 돌이였다. 특별한 모양을 가진것도 아닌 냇가라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있는 그런 것이였다. 그 돌이 자신을 던져달라는 듯한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엔가 홀린듯 그 돌을 집어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매끄러운 것이 아마도 냇가에서 물살에 휩쓸려가며 닳고 닳은 그런 평범한 타원형의 약간 일그러진 돌이였다. 물론 그 녀석이 어떤 종류이며 정확히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던 녀석이란 건 정확히 모른다. 지리학자도 아니며 돌이.. 2007. 3. 30.
변명 언제나 변명은 "그러니까" 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꼭 이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발바닥에 붙어있는 굳은 살 만큼이나 단단히 붙어버렸다. 지금, 빠알간 토끼 아가씨 앞에서 변명을 시작하려는 이 순간. 내 머릿속은 온통 새하얗게 변질되어 떠도는 반점하나 없이 깔끔하게 흰빛으로 가득차 버렸다. 뒷 말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입에서는 벌써 "그러니까..."라고 튀어나오고 있었다. 주워담으려 허공에 손짓을 해볼 틈도 없었다. 소리의 파동은 언제나 행동반응보다 앞서있다. 주워담으려 아무리 휘저어 봤자 파동을 왜곡시킬 뿐, 침잠시킬 수는 없다. 왜곡된 파동은 오히려 오해를 만들어 강력한 역파장으로 돌아오고 만다. 손짓은 무의미할 뿐이다. 빠알간 토끼 아가씨의 큰 눈은 더욱 빨개져서 나를.. 2007. 3. 30.
초록빛과 빨간 여인들 "그러니까 초록빛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초록빛은 초록빛일 뿐이잖아. 라고 말하면 바보같은가?" 한여름의 햇살이 강렬했던 오후 푸른 나뭇잎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밝은 빛이 흘러들어오는 창을 보니 실내는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턱을 괴고, 조금쯤 우울한 표정이 지으며, 차수저를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고 있었다. "에어컨이 너무 세네요." "응. 좀 춥네." 빠알간 토끼아가씨의 뒷쪽을 바라보니 멍한 그림자들이 서성이고 있다가 이내 흐트러져 갔다. 빨간 여인들이 춤을 추고 있다. 알 수 없는 리듬에 맞춰 흔들거리며 그림자들을 흐트린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얼그레이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대화도 안되는군요." "그런가..." "네. 평상시 같.. 2007. 3. 29.
바나나와 시래기 장국. 그리고, 바나나. 이 이야기는 1979년 혹은 1980년, 무척이나 덥던 어느 여름날에 경찰서 유치장 옆 장판을 깔아 놓은 경관들의 쉼터에 앉아 허겁지겁 시래기 장국을 먹은 이야기인 것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강건하고, 활발하고, 모든 이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그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약간의 환상이 첨부되어 있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는 먹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다. 오죽했으면, 아침에 눈을 떠 어머니를 보며 하는 소리는 언제나 "엄마 과자사먹게 10원만 주세요." 였을까. 친구들과 동네에서 뛰놀던 어느날, 누군가 바나나 라는 것을 먹는 것을 목격했다. 깨끗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녀석은 길가에 멍하게 서서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뛰놀던 무리들은 전부 그 앞에서 멈추어 버렸다. 과일가게에서나 테레.. 2007.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