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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서랍속에 그녀의 헤어밴드가 있었다

by kaonic 2007. 4. 4.
서랍이라는 녀석은 웬지 모르게 깊이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랍을 열게 되면 습관적으로 반쯤만 열게 되어 깊이 쑤셔박혀 있는 것들은 보이지도 않게 된다. 물론 그건 나의 관심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인데다가 깊이 알고 싶지 않아서 였겠지만, 가끔 서랍을 전부 열때가 있다. 특별히 흥분하거나 깊이 들어가 있는 녀석을 찾기위해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서랍을 활짝 열어제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녀가 남겨 놓은 빤짝이는 은실이 같이 짜여진 연푸른색의 헤어밴드가 눈에 띈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휩쓸려 10분이고 20분이고 멍하니 헤어밴드를 바라보게 된다.

헤어밴드가 나의 서랍속에 자리잡은지는 거의 2년가까이 지나가고 있는데, 언제고 돌려줘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연히라도 그녀를 만날 일이 생기게 되면 꼭 잊어버리고 만다. 헤어밴드가 나의 책상위에 올려진채로, 그녀의 잊혀짐과 함께 남겨진 후로, 그것은 자리를 서랍속으로 이동하여 언제나 똑같은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헤어밴드 뿐만이 아니다. 그녀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게 물질적 흔적을 남겨 주곤 했었다. 내 첫번째 그녀는 열쇠고리를 (열쇠고리는 아직도 내 열쇠 꾸러미에 달려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다. 그 이후로 거의 10년가까이 지나버렸지만 아직도 열쇠고리는 바뀌지 않고 있다. 웬지 모르게 새로운 열쇠고리라는 것이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지 하며 가지고 다닌 것이 그리 오래되어 버리고, 이제는 그다지 신경쓰이지도 않는다.), 내 두번째 그녀는 부적을(특별한 의미없는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팬시용품의 부적이다. 이 것 또한 끈질기게 따라붙어 내 방 두번째 책상서랍의 작은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다. 가끔 서랍을 정리해서 버리려 해도 알수 없는 힘에 이끌려 버리는 것을 잊는다거나 해서 결국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내 세번째 그녀는 몇갠가의 수제 책갈피를(그것들은 꽤 예쁜 모양이다. 옛날에 읽던 책들사이에 하나하나 꼽혀 있어서, 가끔 책들을 뒤적이다 만나곤 한다.), 내 네번째 그녀는 헤어밴드를, 내 마지막 그녀는 빨간 모자(웬지 모르게 그녀의 맘을 상하게 했던 그날, 손에 들고 있던 모자가 버거워 보였는지 내 가방에 잠시 넣어둔 이후로 까맣게 잊고, 그녀를 떠나보냈었다. 언젠가 우연히라도 만날 일이 있으면 돌려줄 마음과 함께 방 한 구석에 모셔있다. 그렇지만 모든 물건들이 그렇듯이 잊혀지고, 결국엔 주인을 못찾게 될 것 같다.)를 남겼다.

가끔 서랍을 활짝 열어 제끼면 헤어밴드 하나로 인해 이런 것들이 멍하니 떠오르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들 슬프지도, 그립지도, 평소엔 생각나지도 않지만, 서랍속의 헤어밴드를 보면 자꾸만 떠올라 주변을 흐트려놓곤 한다.

이젠 그런 것들도 전부 흐릿하게 잊혀지고 느릿한 소용돌이와 함께 흘러간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