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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주유소 담벼락 밑에 버려진 여행가방

by kaonic 2007. 4. 4.
출근하는 길에 언제나 주유소 담벼락을 지나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 버려진 여행가방을 본 것은 석달 쯤 전이였다. 갈색의 네모 반듯한 낡은 여행가방이였다. 여기저기 오래되어 바래진 항공사 스티커와 공항 스티커가 붙어있고, 떨어져 나간 자국이 남아 있어, 세월과 함께 여행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했다. 요즘의 흔한 바퀴조차 달려있지 않은 여행가방은 그대로 버려져 일주일 가량 방치되었던 듯 하다. 지나가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가. 여행이 떠나고 싶다던가. 저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라던가. 낡은 여행가방이 스쳐지나가듯 그렇게 사유가 스쳐지나갔다.

가방이 사라진 후 한달 쯤 지났을 때, 또다른 여행가방이 같은 자리에 버려져 있었다. 이번에도 낡은 여행가방이였다. 사실 여행가방이라고 하기엔 좀 작은 크기였으며, 그냥 서류가방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 크기였기에 여행가방이라고 단정지어 버린 것이다. 두번째 버려진 여행가방을 발견했을 때 마침 마피아 영화에서 시체를 토막내 여행가방 같은 것에 나누어 넣고, 여기저기 분산시켜 유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가방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세번째 가방을 오늘 아침 같은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아마도 2~3년 쯤 되어보이는 비교적 말끔한 상태의 검은색 바퀴달린 여행가방이 셀로판 테이프로 칭칭 감겨진 채 버려져 있었다. 이전에 같은 자리에 버려져 있던 두개의 가방이 떠올랐다. 머릿속은 점점 복잡한 일을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시체를 토막낸 후 냉동고에 보관했을 것이다. 이후 한 토막씩 꺼내어 요리를 해 먹는다. 남은 뼈와 부산물은 검은 비닐봉지에 밀봉하고, 낡은 여행가방에 집어넣고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동네의 상관없는 곳에 내다 버린다. 이후 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같은일의 반복. 이른바 엽기적인 식인 연쇄살인사건이 아닌가? 최근 <철학적 탐구 - 비트겐슈타인 프로그램>이라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고 있어서 그런 생각이 든걸까. 사실 <철학적 탐구>에서는 식인행위도 없으며, 연쇄살인범은 깔끔한 범행을 벌이고 지적이며 철학적인 논쟁을 좋아한다. 연쇄 살인이라 해도 격이 다른 이른바 전혀 관련없는 연쇄살인이다.

일주일 이내로 사라지는 가방들 누가 가져간 걸까. 길을 가던 부랑자가 잡동사니를 그러모으듯 가방을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가방을 가져가서 열어보고 안에 들어있는 내장찌꺼기와 뼈에 놀라 기겁하고 멀리 내던져 버리고 잊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경찰에 신고했으면 아마도 경찰이 출동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소문이 났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가방에 관해서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뭐 어떻게 되었든 지나친 상상일 뿐이겠지.

그러고보니 출근하는 길에 버려진 가방을 자주 보는 것 같다. 집을 나선 후 골목을 빠져나가는 모퉁이에 놓여진 피카츄가 그려진 낡은 실내화 가방. 쓰레기 봉투 사이로 비쳐보이던 낡은 아디다스 가방. 지하철 입구에 놓여진 쓰레기통 위에 올려져있던 가짜임이 분명한 루이비통. 싫증이 난 것인지 개찰구 앞 쓰레기통에 던져지던 어느 잡지에서 부록으로 준 비교적 깨끗한 가방. 6층 건물의 로비로 올라가는 계단의 난간 위에 올려져 있던 낡은 서류가방. 각각의 가방에는 각각의 역사를 담고 있었겠지. 실내화 주머니를 흔들며 친구와 웃고, 떠들고, 다투는 이야기. 처음 산 아디다스 가방을 메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이야기. 진품을 살 돈이 없어서 가짜를 샀지만, 금새 진품과 구분되는 점이 발견되어 창피했던 이야기. 값싸게 예쁜 가방을 얻었다며 이것저것 넣어서 가지고 다녀보지만, 금새 싫증나고 쉽게 헐어버려 기분이 상했던 이야기. 일주일을 꼬박 새며 작성한 서류를 퇴짜맞고 늦은 밤 포장마차를 찾아 서류가방을 옆자리에 놓고 술 한잔 기울이던 이야기.

그렇게 몸에서 가깝게 지내던 가방이 소중한 추억과 함께, 씁쓸한 기억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