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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오랜 기억 속의 친구로부터......

by kaonic 2007.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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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월은 바람처럼 제멋대로 굴곡을 그리며 흘러간다. 삶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가는 일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가만히 앉아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만히 앉아 다가오는 인연을 흘려보내고 후회한 적도, 가만히 앉아 다가오는 행운을 흘려보내고 후회한 적도 있다. 그럼으로써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하나하나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은 아닐지라도 내게는 까마득한 기억저편의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나도 까마득했던지라 누구인지 떠오르지도 않아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는 내게 지나간 단편들을 하나하나 말하며, 기억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낮설게만 느껴지는 동창회. 고등학교 친구들 이야기.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그들의 얼굴도, 이름도, 그 무엇하나 제대로 떠오르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누구는 결혼을 했으며, 누구는 이혼을 해서 딸 아이와 부녀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누구는 죽었다. 아직 삶의 반도 살지 못했는데 벌써 죽어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흘러 들어올 줄은 몰랐으므로 깜짝 놀랐다. 그렇다고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나간 인연을 얼마나 망각하고 지내왔는지......

이런저런 지나간 기억떠올리기가 흘러가고, 녀석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할 즈음, 녀석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결혼을 했으며, 자식이 둘이 있다는 이야기.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는 이야기. 그리고, 조심스런 목소리로 부탁을 해오기 시작했다. 모 경제신문의 데스크로 근무하고 있는데, 신문사가 어려워져서 영업담당이 아닌 데스크에게까지 할당량이 부여되었다면서 신문 구독을 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 일간지도 읽지 않는 판에, 경제에는 관심도 없이 재테크란 것은 어디까지나 강건너 불구경처럼 살아온 내게 경제신문을 구독한다는 사실은 그냥 돈을 적선하는 셈이므로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힘든 세상이구나 싶어 살짝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다. 아마도 내가 아닌 누군가는 구독해 줄터이니 그다지 미안한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말이다. 10년이 넘게 연락조차 되지 않던 상태로 지내오던 녀석이 주변에 이어진 모든 끈을 잡아당겨 연락처를 알아내고, 하나하나 연락하며 비굴한 부탁을 하게 된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 필요 없는 것을 사줄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할 말이 없어졌다. 녀석은 미안하다고, 나중에 동창회 모임을 하게 되면 연락을 준다고 거듭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또다른 이에게 전화를 할테고 부탁을 하겠지. 나는 죽은 이보다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녀석이 더 가엾게 느껴졌다. 무척 밝은 성격으로 구김없이 그 누구와도 허물없이 잘 지내던 녀석이였으니 하나의 고비를 넘으면 또다른 고비가 오기전까지 별 탈 없이 잘 살아갈 녀석이므로 걱정은 안 된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니 돈도, 결혼도, 아이도, 생활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자신이 더욱 가여워졌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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