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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오늘은 [4월 19일]입니다. - 4.19 민주혁명의 의미

by kaonic 2007. 4. 19.
그렇습니다.

오늘은 4.19 민주혁명이 일어난지 4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 4월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습니다. 4.19혁명은 8.15해방과 분단 이후 성립된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에 대한 변화요구를 배경으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가 촉발되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불완전한 농지개혁, 귀속재산 불하(拂下), 미국의 막대한 원조 등에 의한 구조적인 문제점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1950년대 말에 이르자 미국에 경제침체가 찾아옵니다. 이와 더불어 동북아시아 전략구도에 입각한 대한정책의 변화가 일어나 원조에 의존한 국가적 자본축적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른바 초기 경제적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요인과 함께 내적으로는 원조받은 물자와 그 판매대금에 의한 독점자본이 형성되고, 생산활동에 대한 투자보다는 유통상업 부문에서의 폭리가 발생합니다. 이에 따라 내부 생산이 저하되는 수순을 밟게 됩니다. 또한, 미국에서 생산된 잉여농산물의 도입과 생활 필수품의 독점이 이루어져, 당시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층의 빈궁과 이에 따른 농업의 황폐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따라 농촌을 떠나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증가된 이농민은 도시 노동자의 공급과잉을 초래하고, 이는 당연하게도 실업, 빈곤, 저임금의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결국 경제구조가 확실하게 악화되어버린 것이죠.

당시는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는데, 이승만 정권은 6.25 전쟁 이후 국군과 경찰력의 증강 등을 이용해 국회에서 취약한 지지기반을 보완하려 합니다. 이러한 독재적 경향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성격과 정권의 핵심을 이루는 친일 관료, 경찰집단의 비민주적 성향과 어울려 강화되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시기는 미국의 원조정책 변화에 따른 경제적 위기, 자본주의 발전에 의한 사회적인 분화, 이승만 정권의 억압적인 지배, 국민의 궁핍화가 모두 어우러져, 보다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되는 때 였습니다. 보다 확실히 살펴보면 영구집권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정치적 부패 등에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된 것에서 촉발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제 직접적인 혁명의 시작을 따져보겠습니다.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지지 성황과 투표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살아있던 것인지,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의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함으로써 부정선거계획이 만 천하에 공개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때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사함으로써,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3월17일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무도 실제 선거결과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선거라는 미명하에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으나, 그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에 불과하였기 때문입니다.

4.19혁명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4.19혁명이라고 불리울까요? 조금만 참고 읽어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습니다. 그것은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고 외치면서 데모를 벌이게 됩니다.

이어 3월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일,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습니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부패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게 됩니다. 경찰과 자유당은 정치폭력배를 동원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키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는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 더욱 크게 봉기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소식은 곧 전국에 퍼져나가게 됩니다.

4월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간 간혈적으로 벌어지던 데모가 일제히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4월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연좌 시위를 하자,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오후 4시에는 부산· 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됩니다. 오후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사상자가 다수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날이 전국적인 혁명이 시작된 날이 된 것입니다.

4월 25일 오후 5시 45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평화적 시위를 감행, 시가를 행진했습니다. 교수단의 시위는 이제까지의 학생시위에 이어,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결단을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일격이 되어주었습니다. 26일 상오 10시 이승만 대통령은 드디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린 것입니다.

4.19 국립묘지 추모관

3월에 찾아본 4.19 국립묘지 추모관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게 혁명은 성취되었습니다. 혁명의 여운은 이기붕 일가족의 자살과 이승만의 망명이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과도 내각의 성립으로 일단 막을 내리게 됩니다. 곧이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혁명의 결과로 이루어낸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집권당인 민주당은 신·구파로 양분되어 급기야는 당이 분리되고 맙니다. 또한, 사회는 데모를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데모만능시대의 양상을 보이면서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4.19 혁명은 후속과업을 성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서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당시에 피흘린 이들이 있기에 오늘날이 있는 것이겠죠? 이 글을 읽는 동안이라도 그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