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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그래픽 노블 300 그리고, 당시의 역사적 배경

by kaonic 2007.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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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프랭크 밀러 글.그림, 린 발리 채색, 김지선 옮김/세미콜론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300>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의 탈을 쓴 실사 애니메이션이지만 모두 영화라고 부르는 <300>의 개봉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는 <300>에 대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뭇 여성들의 근육질 남자에 대한 관심이 팽배해졌다(남자들 입장에서는 잠시 등장했던 신탁녀의 황홀한 모습에 훨씬 많은 관심이 갔던 것도 사실). 이렇게 말하면 물론 비약적 과장이겠지만, 어쨌든 일부는 그러했고, 일부는 그저 한 순간의 재미에 그치고 말았으며, 일부에게는 그리스를 바탕으로 한 서양 중심의 왜곡된 역사적 관점에 불쾌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한참 <스파이더맨3>가 휩쓸고 지나간 이제와서 이미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300>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굉장한 뒷북이겠지만, 어쨌든, 뒤늦게나마 그래픽 노블 <300>을 감상하게 되었음에 벅차는 엔터테인먼트의 감각적 흥분을 글로나마 스리슬쩍 풀어놓을까 한다.

그래픽 노블은 무엇이고 프랭크 밀러는 어떤 사람인가? 검색해보면 미흡하지만 정보가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가 귀찮은 이들을 위해 나름대로 재정리해보도록 한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나? 생각해보면, <씬시티>가 영화화 되면서 였던 것 같다. 이와 함께 그래픽 노블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씬시티>는 그래픽 노블이라기 보다 코믹스로 분류된다. 어찌되었든 이전에 국내에서는 그래픽 노블에 관한 관심이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일부 매니아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덕분에 아메리카 그래픽 노블계의 거장 프랭크 밀러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즐겨보고, 공유하는 하위 문화에 속해 있었다. 사실 현재도 그다지 많은 문화적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영화를 좋아하고 뒷 배경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좀 알려진 편이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정보는 <성완경의 세계만화탐사>(2002)라는 책을 참조하면 좋다. 현재 재개정판으로 <세계만화>(2006)가 출간되어 있다. 유럽과 북남미의 만화가 일본과 한국, 중국, 대만을 비롯한 동양권과 다른 어떤 역사적 흐름 속에서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이후 서양 만화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만화가들을 가려 뽑아 그들의 생애와 작품세계 그리고 대표작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특성상 지극히 연구자 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긴 하지만,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역사적 과정을 이론적으로 잘 뽑아 놓았으니, 만화를 비롯한 대중 문화 예술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는 꽤 도움이 될 듯 하다.

어찌되었든 유럽과 북남미에서 출간되는 그래픽 노블은 차별적이기 보다는 일반 코믹스에 비해 고상해 보이려는 노력으로 칭할 수 있다. 그래픽 노블이건 일반 코믹스건 형식적인 면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은 성인 취향의 만화를 좀 더 그럴듯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간단하지만, 조금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코믹스에 비해 소재와 스타일의 다원성과 혼합성, 그리고 독창성과 실험성을 가미한 것들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른다. 주로 서양만화의 일부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데 상당한 시간을 쏟아서 기존의 코믹스라 불리는 만화에 비해 더욱 밀도 있는 그림을 그려 한 장 한 장이 고급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서양화 작품 수준에 이른다. 이러한 특징은 유럽의 일부 유명 그래픽 노블 작가들의 개인전 등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들은 일반 회화 작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액자에 넣어진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가 자꾸 삼천포로 빠지고 있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한다.

프랭크 밀러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출판사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그는 1957년 메릴랜드에서 태어나 1977년 골드키 코믹스의 <더 트와이라잇 존>을 통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2년 뒤인 1979년, 맹인 슈퍼 히어로라는 특이한 설정을 가진 <데어데블>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DC 코믹스로 자리를 옮겨 일본 시대극과 사이버 펑크를 결합한 <로닌>을 발표하며 만화가로서 입지를 다져 갔다. 또한 <로보캅> 2, 3의 각본을 쓰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등 일찍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의 작품 중 <씬시티> <데어데블> <엘렉트라> 등은 영화로 만들어져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 중 <엘렉트라>는 좀 빼줬으면 좋겠다. 그다지 재미가 없던 데다, 이야기가 두서 없이 흐트러져 불쾌한 영화였다. 그러고보니 프랭크 밀러 원작의 영화는 전부 본 셈이다.

이렇게 보면 프랭크 밀러는 굉장히 영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로닌>의 영화화 계획이 잡혀 있고, <씬시티2>의 계획이 잡혀 있으니 그의 대표작이 전부 영화로 등장하는 셈이다. 로닌(浪人)은 봉건시대 일본에서 주군을 잃은 불명예스러운 사무라이를 일컫는 말로써, 21세기의 뉴욕에서 주군의 검이 발견되면서 로닌과 악마가 부활해 벌이는 대결을 시대극과 사이버펑크가 결합된 장르로 그려낸 작품이다. 꽤 재밋게 봤던 댄스 뮤지컬 드라마 <스톰프 더 야드>의 실바인 화이트 감독이 연출한다니 살짝 기대를 가져볼 만 하다. 앞서 말한 작품들 외에 <배트맨:다크 나이트 리턴즈 Batman The Dark Knight Returns>도 영화화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앞서 어서 번역본이 출간되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해 본다.

드디어 화통하신 프리미어님이 선물한 그래픽 노블 <300>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300>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정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 듯, BC 480년 7월 제3차 페르시아 전쟁 때 테살리아 지방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일어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린 시절 <300 스파르탄>이라는 영화를 보고 스파르타에 대해 알게 된 프랭크 밀러는 평생 이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고, 결국 이를 그래픽 노블로 탄생시켰다.

<300>을 그리기 위해 그는 테르모필레 협곡을 답사하고, <씬시티>, <베트맨:다크 나이트 리턴즈> 등에서 보여줬던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접목시켰다. 거친듯 하면서 담담하고, 영화와 같은 연출을 담은 것이다. 또한, <베트맨: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부터 호흡을 맞춘 린 발리가 채색을 맡아 <300>특유의 색감을 형성해 냈다. 이후 <300>은 발간되지마자 수 많은 매니아를 양산해 내며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그래픽 노블과 관련된 많은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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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 <300>이 영화 <300>과 다른 점은 훨씬 거칠어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표현한 것에 비해 거칠고, 프랭크 밀러 특유의 힘있는 뎃생과 진한 명암 덕분에 현실감이 가득하다. 이와 더불어 음영의 극단적인 처리를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린 발리의 채색은 화려한 색감은 아니지만, 차분한 색상 조합으로 힘 있는 라인 속에  입체감을 불어넣어 준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다 보면 단순한 스토리지만 힘 있는 전개와 비장한 글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고대의 헤르도토스와 플루타르크는 그들의 역사서 속에서 스파르타인들에게 역사적 생명을 주었다. 그렇다해도, 현재에 이르러서 당시의 문화권에 속해있는 고대 도시와 사회 조직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몇몇 고고학자들은 스파르타에서 수마일 떨어져 있는 그리스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 바로 이 곳에서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 부대가 수백만 명에 이르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에 맞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단순히 그리스 문명을 자신의 뿌리로 생각하는 서양인들의 해석일 뿐이다.

전설과도 같은 300명 대 수백만 명의 전투는 대단히 높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비록 짧은 내용이긴 하나 몇몇 역사서에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서양인들에게 페르시아 제국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던 악의 축에 불과 했을 뿐이고, 스파르타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전설적인 영웅을 탄생시킨 도시국가로 각인된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이와 관련된 영화와 소설 등이 다수 발표되었다. 국내에 출간된 소설로는 스티븐 프레스필드의 <불의 문>이 있다. 1998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최근 국내에 출간된 그래픽 노블 <300>과 유사한 시각으로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으며, 영웅적인 전투의 현장을 한 명의 생존자가 구술해 그리스 전역으로 퍼트린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고보니 두 작품의 발표시기도 비슷하다. 재밌게도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장르로써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발표된 것이다.

헤르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이끄는 200만명에 달하는 페르시아 병력이 헬레스폰트를 넘어, 그리스를 침공, 정복하기 위해 진군했다.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 와중에 선발된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 부대가 테르모필레 협곡에 파견되었다. 테르모필레 협곡은 산과 바다를 나누고 있었으며, 그 협소한 지형으로 페르시아인들과 기병부대를 가두어 무찌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했던 스파르타의 정예 부대는 원했던 바대로 단 몇 일 이나마 침략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었다.

300명의 스파르타인들과 동맹군은 무기가 다 부서져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7일 동안 침략자들에게 저항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맨손과 이빨 만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스파르타인들과 테스파이아 동맹군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보여준 용맹함을 받들어 그리스인들은 다시 모였으며, 가을과 봄에 있었던 살라미스와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인들을 무찔러 발생지에서 소멸할 뻔 했던 민주주의와 자유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테르모필레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중 하나는 현대에 와서 세워진 것으로, 테르모필레에서 전사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를 기리는 기념비다. 이 비석에는 스파르타인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하는 크세르크세스의 요청에 대한 대답이 새겨져 있다. 레오니다스의 대답은 단 두 마디였다. "Molon labe." 즉, "와서 무기를 가져가라."이다. 또하나의 기념비는 오래전에 세워진 것으로 시인 시모니데스의 시구가 새겨진 초라한 돌비석이다. 그 시구는 용사들을 위한 비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길손들이여, 스파르타에 가서 전해주오. 조국의 명을 받들어 여기, 우리가 이렇게 누워 있노라고."

그래픽 노블 <300>에서는 전투가 끝나고 전사한 레오니다스의 유언으로 이 말을 멋지게 변형해 표현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는 자유인은 들어라. 언제까지나 영원히... 세월이 깃든 바위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그대에게 속삭일 지니. 스파르타에 전하라. 지나는 이여. 스파르타의 법에 따라 여기, 우리가 누워 있다고."

헤르도토스의 <역사>에 실린 글을 빌어오자면, 스파르타와 테스파이아 군대도 용맹스러웠지만, 그 중 가장 용감했던 자는 스파르타인 디에네케스였다고 한다. 전쟁 전야에 트라키아 원주민이 디에네케스에게 말하길, 페르시아 궁수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들이 일제히 활을 쏘면 화살비가 태양을 가릴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디에네케스는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잘됐군. 그렇다면 우리 군대는 그늘에서 전투를 할 수 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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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말 스파르타는 고대 민주주의를 수호한 것일까. 당시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전후로 이어지는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스파르타인은 본래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에 침략군으로 들어온 도라아인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9세기 말에 이르러 라코니아 지방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다이케토스 산맥 서쪽에 자리잡은 비옥한 메세니아 평원을 정복하고자 했다.

이후 메세니아인의 영토는 라코니아에 병합되기에 이른다. 이후 아르고스의 원조를 얻은 메세니아인들은 스파르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스파르타의 본거지인 라코니아마저도 침략을 당하기에 이른다. 필사적인 전투와 운 좋은 상황 전개에 의해 겨우 살아남은 스파르타인은 메세니아인의 토지를 몰수했고, 그들의 지도자를 살해 또는 추방했으며, 메세니아인을 헤일로타이(노예)로 만들었다. 그후 스파르타는 방어적인 대외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메세니아 전쟁 이후 스파르타인의 생활방식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들의 적을 정복하고 약탈하고, 반란에 대응하는 동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고 만 스파르타인은 반란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 보수주의의 입장에 서서 변화에 대해 완강한 저항을 하게 되었다. 어떠한 혁신적인 조치도 기존 체계에 치명적인 약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위험한 사상의 유입이 초래할 결과를 두려워한 나머지 여행을 억제했고, 외부세계와의 교역도 금지하기에 이른다. 엄청난 수의 노예에 대해 시민 계급의 절대적 우위를 확보할 필요성으로 시민 개개인에게는 엄격한 규율과 복종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집단주의는 사회, 경제 생활의 모든 부문으로 파급되었다. 결국 문화적으로 퇴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스파르타의 정부는 과거부터 이어진 오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왕은 한 명이 아니라 유력한 가문을 대표하는 두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왕들은 권력이 거의 없었고, 그 권력이라는 것도 주로 군사, 사제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하위 기관으로 두 명의 왕과 28명의 귀족(60세 이상)으로 구성된 원로회가 있었다. 이 원로회는 행정부의 활동을 감독하고, 민회에 제출될 법안을 마련했으며, 형사 재판의 최고 법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원로회의 하위 기관인 민회는 모근 상인 남자 시민으로 구성되었는데, 원로회가 제출한 범안을 승인 또는 거부했으며, 왕을 제외한 모든 공직자의 선출권을 가졌다. 그러나 사실상의 최고 권력은 5명으로 구성된 감독관 위원회였다. 감독관들은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원로회와 민회를 주재했고, 교육제도와 재산 분배를 통제했다.그들은 또한 갓 태어난 아기의 생사여부를 결정했으며, 원로회에 기소할 권리를 가졌고, 종교적 징조가 불길할 경우에는 왕마저도 폐위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스파르타 정부는 사실상 과두정이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인은 대체로 세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지배 계급은 스파르타 시민으로서 그들은 원래 정복자의 후손이었다. 시민은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했으나 정치적 특권을 독점했다. 두번째 계급은 변두리 사람으로 칭하는 페리오이코이였다. 이 계급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과거 스파르타의 동맹국의 주민이었거나 스파르타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복종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배 계급과 최하위 계급은 헤일로타이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는 대가로 페리오이코이에게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사회의 하층에는 토지에 결박된 헤일로타이, 즉 노예들이 있었다. 이들 계급 중 가장 자유스럽고 안락한 생활을 누린 계급은 페리오이코이뿐이었다.

스파르타 시민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고귀한 노예로 지내야 했다. 그들은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가혹한 훈련을 감수해야 했고, 개인의 생활까지도 희생해야 했다. 결국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유아들은 태어나자마자 건강을 시험받아야 했고, 허약하다고 간주된 유아들은 언덕에 내던져 죽도록 방치되었다. 스파르타 시민 계급 남성들의 교육은 거의 전부가 군사훈련이었다. 7세 부터 시작된 훈련은 목숨을 걸 정도로 무자비 했으며, 나이가 차 훈련이 끝난 이후에도 20세부터 60세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국가를 위한 봉사에 바쳐졌다. 결혼은 사실상 후손을 얻기위한 강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더라도 가정생활을 할 시간은 없었다. 젊은이들은 병영에서 살아야 했으며, 30세 이후에도 식사는 병영에서 해야만 했다. 남편들은 결혼하는 날 밤에 자신의 무용을 과시함으로써 아내를 데려갈 수있었다. 일단 결혼한 후에도 자신의 부인을 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낮에 아내의 열굴을 볼 새도 없이 자녀를 갖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여자들은 성년이 되면 결혼해서 건강한 자식을 낳는 것이 주 임무였으며, 어머니들은 어린 자식이 국가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처럼 시민계급이 스스로를 노예와 가깝게 속박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들은 결국 스파르타의 경제를 오로지 군사적 효율과 시민계급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도록 만들어 스파르타의 정부가 억압적이었던 것 만큼 경제가 정체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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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의 주인공이 되는 레오니다스 왕을 비롯한 스파르타 정예 부대원 300명은 시민 계급으로 태어나 7살 부터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온갖 전투를 거쳐, 오로지 명예와 명분만을 위해 살아가고 죽어간 셈이다. 그들 자신은 시민으로써 지위에 대한 자부심으로 당당히 전투에 참여해 죽어갔겠지만, 현재에 이르러서 이모저모 따져보니 굉장히 불쌍해 보인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투는 이후 그리스가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발판이 되어 주긴 했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폐퇴 이후 페르시아인의 재침공을 두려워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델로스 동맹을 통해 아테네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게 되고, 스파르타는 갈등 속에 문화적으로 뒤쳐지게 되버렸다. 결국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은 한동안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조야한 야만인으로 간주했으며, 스파르타인은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의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노리고 헤일로타이를 부추켜 반란을 일으키려한다고 비난했다.

이후 기원전 431년에 발발해서 404년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의 무역은 붕괴 되었고,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지켜졌다고 여겨졌던 민주정은 스파르타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를 스파르타의 속국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으며, 그리스 세계 전역에 걸쳐 자유를 멸절시켰다. 민주정이 행해지던 지역에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과두정이 들어서고 말았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했다고 알려진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부대의 장렬한 전투는 세월이 흘러 결과적으로 그리스의 민주정을 전복시켰으며, 자유를 빼앗고 만 셈이다.

정치적 와해를 비롯한 도시 국가들간의 끊임없는 갈등을 거쳐, 오랜 전쟁 시기가 찾아오고 만다. 이에따라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기력이 쇠진하고 말았다. 결국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에 의해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전체가 지배당하게 된다. 이후 그리스의 지배는 필리포스의 아들이자 약관 20세의 청년이던 알렉산드로스의 손으로 넘어간다. 곧이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이 시작된다. 페르시아에 침략당했던 그리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12년간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끝에 인더스 강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로니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32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