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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시리도록 아쉬운 시간의 기억들

by kaonic 2007. 9. 3.
몸을 휘감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높고 파아란 하늘을 보니 계절이 변화하는 것이 느껴진다.

낮에는 아직 덥지만 곧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어오며 단풍이 물들테고, 낙엽도 지겠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겨울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름을 그리워하게 되겠지. 겨울이 깊어가면서 한 해를 마감할테고, 올해도 여전히 한 해를 알차게 보낸 것 같지 않아 아쉬워하며 지난해에 세웠던 다짐을 반복하며 다음 해를 맞이할테지. 지독하게 반복되는 삶의 순환로에서 어떻게 분기점을 지나도 벗어날 길이 없음을 한탄하겠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일이 계속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믿음으로 생을 이어갈테지.

특별히 가을을 타는 건 아니지만, 계절이 변화하면 묘하게도 지나간 계절이 몸서리쳐지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여름 끝자락에서 가을을 바라보면, 한 여름의 뜨거웠던 기억들이 그리워지고, 겨울 끝자락에서 봄을 바라보면, 한 겨울의 시리도록 차가운 기억들이 그리워진다. 그렇게 지난 세월이 좋았노라고 기억할 수 있는 건 끈임없는 기억의 변주자가 지나간 일들을 마치 선물처럼 기분좋게 과장해서 포장하고, 어두운 단편들을 분리수거 하듯 분류하고 정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의식적인 망각과 의식적인 과장은 이미 사고회로의 한 부분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방해되어 흐릿하게 변조된 기억은 감정의 흔적조차 잊어버린 듯 희미하게 되었다. 반면, 강조되어 또렷하게 각인된 기억은 감정을 왜곡시키고 그 흔적을 미화시켜버린다. 유난히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걸 보면, 자신에게 "정情"이란 것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국민학교 시절의 친구들 이름은 전부 잊어버린지 오래다. 중학교 시절의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 단 한 명,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친구로 지내는 녀석만 알고 있다. 가끔 그가 옛 시절에 같이 학교를 다녔다며 누군가의 이름을 끄집어내면 전혀 기억나지 않아 난감하다.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 역시 대부분 이름을 잊어버렸다. 길다면 길 수 있는 시간동안 스쳐간 사람들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려 노력해 보지만, 아직까지도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들 외에는 이름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속의 사건에는 항상 익명의 그들이 존재할 따름이다.

사건은 남고, 사람은 잊혀져 간다.

인연을 소중히 하라는 말도 있고, 사람이 재산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 것들을 이용해 나로선 해내지 못할 일들을 이루어 내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들처럼 사람을 관리할 자신은 없다. 그러고 보면, 나 자신은 관리당하는 입장에 있지, 관리하는 입장에 서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친구들에게서 오랜시간 연락이 없으면, 인연이 끊기게 될 정도로 무심하기 그지 없다. 언젠가 그런 점을 고쳐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억울한 오해만 산 적이 있다. 하긴, 내내 연락을 받기만 하던 이가 갑작스레 일주일 간격으로 연락을 해대면 뭔가 숨기고 있다고 의심 안 할 사람이 있긴 한가.

결국 내게 맞지 않는 관계의 유지노력은 포기하고 나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대견할 지경이다. 그들의 관심이 없었다면, 분명 친구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어 세상 홀로 존재한다고 중얼거리며, 유아론자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날을 잡아서 고마운 그들에게 술이라도 한 잔 사야 겠다. 최근에 마주친 이들 중에서 10여 년이 흐른 후, 기억속에 남아있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웬지 두려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