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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상실

by kaonic 2007.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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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은 어떤 것이든 그 무게가 각각 다르다곤 하지만, 경우에 따라 무게 보다 상황에 견주게 되는 일도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몇가지 작지 않은 대수로운 일들이 가슴을 서서히 압박하던 와중 현재와 함께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실감하기 시작한지 2주 정도가 지났다. 결국 지지난 밤엔 만취해서 추태까지 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신경쓰이는 것들이 우연찮게 겹친 결과로 3년 만에 주사를 부리는 볼썽사납고도 부끄러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잘려나간 필름 조각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고, 순간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헤집으며 스스로 침울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침부터 흐리마리해진 정신은 말머리성운에서 유영하며 안드로메다를 바라보는 지경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제정신을 가장하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의기소침해지면 더더욱 정신이 연약해지는 것인지 출근길에 읽고 있던 책은 환상의 나라가 아닌 혼돈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 꺼꾸로 꽂아 버렸다. 아직 세상이 무너진 것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흔들리고 있는 자신이 너무 연약해 가여웠지만 내색해봤자 스스로에게 실망할 뿐이라 그만 두었다. 그런 와중에 지지난 밤의 추태로 똑 떨어진 현금을 채우기 위해 현금인출기 앞에서 통장에 남아있는 잔돈을 모두 긁어냈다. 그리고 인출기 위에 읽고있던 책을 두고 그냥 출근해 버린 것이다. 스트레스에 빠지면 더욱 산만해진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기라도 하듯 산만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며 책이 사라진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달려가서 더듬어 보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출근길에 들렀던 편의점에 들어가 확인한 후 역시나 실망하고, 은행으로 달려가 현금인출기 앞에서 또 한 번 실망했다. 없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참을 수 없이 오가며 시간을 낭비하고보니 애써 무시하며 지나친, 그리고 앞으로 지나치게 될 모든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또 긴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