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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상자

어떤 죽음이 추모받아야 하는 죽음일까.

by kaonic 2007. 7. 31.
목숨은 모두 똑같은데, 어떤 죽음은 다른 죽어갈 이들의 온갖 관심을 받고, 어떤 죽음은 수 많은 이들에게 외면받고 있다. 때로는 목숨을 살리기 위해 다른 이의 삶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맞아죽고, 어떤 이들은 사고로 죽어가고, 어떤 이들은 병들어 죽어간다. 그런 목숨은 그냥. 목숨일까. 누구에게나 소중한 사람은 있는 법이고 각자에게 자신의 목숨은 매우 소중하다.

이번 피납사건도 마찬가지 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한국에서 그들의 목숨은 매우 안타까운 일로 생각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그들이 생환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독교 관련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다른 곳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목숨은 어떨까? 그건 우리가 TV를 보며, 신문을 보며, 어디선가의 죽음에 관련된 소식을 접하고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평범한 사건 정도라면, 어디서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몇 명이 죽었데, 어디서 누가 살해당했데, 그래? 안타깝구나. 저런 나쁜 놈. 그리고 잊어버린다. 이정도의 관심을 받는 사건이라면, 뉴스를 통해 보다 빈번한 접촉이 있어 인지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다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죽음이 아닌 한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인간은 그정도의 동정심만 가지면 된다. 만약, 모든 사건과 사고에 심각하게 가슴속 깊이 걱정하고, 모든 죽음에 애절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면 인류의 구세주가 될 자격이 있다.

23명이 납치 되었고, 몇 명이 죽어가는 동안에도 미국에서는 탈레반 세력을 공격했으며, 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지나간 이야기를 가져와도 미군의 폭격으로 아프간에서 죽어나간 어린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꼭 아프간의 이야기만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개 죽음은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매스컴에서는 납치된 사람들의 목숨은 마치 제 자식의 목숨이라도 되는 양 걱정하면서도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단순한 보도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반응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저 어디선가 한국인 23명을 납치한 세력이 조금 죽어나간 정도일 뿐이다. 하나의 목숨은 단 하나의 개별성을 가지므로, 그 목숨을 가볍게 숫자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인질 한 명의 추가 살해 정도로 구출작전을 감행해야 한다는 등의 과격한 의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건 참을 수 없다. 그로 인해 추가로 죽어나갈 사람들의 목숨은 왜 생각하지 않는 걸까.

수 많은 보도자료들이 떠돌고 있지만,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냄비 근성으로 중무장 할 것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대화가 오고갈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로 얄팍한 분노를 끓어오르게 할 필요는 없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남은 목숨을 위해서라도 죽음에 동요되지 말고 침착한 대응이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