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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10

변명 언제나 변명은 "그러니까" 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꼭 이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발바닥에 붙어있는 굳은 살 만큼이나 단단히 붙어버렸다. 지금, 빠알간 토끼 아가씨 앞에서 변명을 시작하려는 이 순간. 내 머릿속은 온통 새하얗게 변질되어 떠도는 반점하나 없이 깔끔하게 흰빛으로 가득차 버렸다. 뒷 말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입에서는 벌써 "그러니까..."라고 튀어나오고 있었다. 주워담으려 허공에 손짓을 해볼 틈도 없었다. 소리의 파동은 언제나 행동반응보다 앞서있다. 주워담으려 아무리 휘저어 봤자 파동을 왜곡시킬 뿐, 침잠시킬 수는 없다. 왜곡된 파동은 오히려 오해를 만들어 강력한 역파장으로 돌아오고 만다. 손짓은 무의미할 뿐이다. 빠알간 토끼 아가씨의 큰 눈은 더욱 빨개져서 나를.. 2007. 3. 30.
초록빛과 빨간 여인들 "그러니까 초록빛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초록빛은 초록빛일 뿐이잖아. 라고 말하면 바보같은가?" 한여름의 햇살이 강렬했던 오후 푸른 나뭇잎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밝은 빛이 흘러들어오는 창을 보니 실내는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턱을 괴고, 조금쯤 우울한 표정이 지으며, 차수저를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고 있었다. "에어컨이 너무 세네요." "응. 좀 춥네." 빠알간 토끼아가씨의 뒷쪽을 바라보니 멍한 그림자들이 서성이고 있다가 이내 흐트러져 갔다. 빨간 여인들이 춤을 추고 있다. 알 수 없는 리듬에 맞춰 흔들거리며 그림자들을 흐트린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얼그레이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대화도 안되는군요." "그런가..." "네. 평상시 같.. 2007. 3. 29.
먼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며,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 속에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그렇게 바라보다 멍해져버렸다. "이봐요."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들려오던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앞에는 빠알간 토끼아가씨가 팔짱을 끼고 잔뜩 부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뭘 그리 생각해요?" "아... 글쎄. 뭘 생각하고 있었지?" "훗. 그걸 다시 되물으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모르겠군." 창을 등진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팔짱을 풀고, 턱을 괴며 웃음지었다. 창밖은 조금씩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그녀는 그 빛을 받아서인지 더욱 빨간 실루엣을.. 2007. 3. 28.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어째서일까?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나보다.(여기서의 남자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성이란 뜻은 아니다.) 그녀는 마치 여자들끼리 주고받을 이야기를 내게 하곤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즉각적인 반응에 곤란함을 겪는다. 그렇지만 그녀와 이야기 하는 것은 즐겁다고 볼 수 있다. 지루하지 않으며,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다지 짜증내는 기색이 없다. 그래선지 곤란한 이야기도 몇일 사이에 어느샌가 익숙해져버린것만 같다. 이런 것을 계기로 조금이라도 여자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한심한 생각을 해보았다. (여자란 남자에게 있어서 영원한 수수께끼인데 말이다. 물론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란 존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서로 영원히 완벽하게 이해할 길이 없어보인다.) "라면이 너무 맛있.. 2007.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