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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16

초록빛과 빨간 여인들 "그러니까 초록빛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초록빛은 초록빛일 뿐이잖아. 라고 말하면 바보같은가?" 한여름의 햇살이 강렬했던 오후 푸른 나뭇잎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밝은 빛이 흘러들어오는 창을 보니 실내는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턱을 괴고, 조금쯤 우울한 표정이 지으며, 차수저를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고 있었다. "에어컨이 너무 세네요." "응. 좀 춥네." 빠알간 토끼아가씨의 뒷쪽을 바라보니 멍한 그림자들이 서성이고 있다가 이내 흐트러져 갔다. 빨간 여인들이 춤을 추고 있다. 알 수 없는 리듬에 맞춰 흔들거리며 그림자들을 흐트린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얼그레이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대화도 안되는군요." "그런가..." "네. 평상시 같.. 2007. 3. 29.
바나나와 시래기 장국. 그리고, 바나나. 이 이야기는 1979년 혹은 1980년, 무척이나 덥던 어느 여름날에 경찰서 유치장 옆 장판을 깔아 놓은 경관들의 쉼터에 앉아 허겁지겁 시래기 장국을 먹은 이야기인 것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강건하고, 활발하고, 모든 이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그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약간의 환상이 첨부되어 있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는 먹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다. 오죽했으면, 아침에 눈을 떠 어머니를 보며 하는 소리는 언제나 "엄마 과자사먹게 10원만 주세요." 였을까. 친구들과 동네에서 뛰놀던 어느날, 누군가 바나나 라는 것을 먹는 것을 목격했다. 깨끗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녀석은 길가에 멍하게 서서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뛰놀던 무리들은 전부 그 앞에서 멈추어 버렸다. 과일가게에서나 테레.. 2007. 3. 29.
먼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며,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 속에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그렇게 바라보다 멍해져버렸다. "이봐요."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들려오던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앞에는 빠알간 토끼아가씨가 팔짱을 끼고 잔뜩 부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뭘 그리 생각해요?" "아... 글쎄. 뭘 생각하고 있었지?" "훗. 그걸 다시 되물으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모르겠군." 창을 등진 빠알간 토끼아가씨는 팔짱을 풀고, 턱을 괴며 웃음지었다. 창밖은 조금씩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그녀는 그 빛을 받아서인지 더욱 빨간 실루엣을.. 2007. 3. 28.
꿈에 관한 것 같지 않아도, 꿈에 대한 이야기 "꿈을 꾸지 않으면 안돼." 언젠가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꿈을 꾸지 않으면 이른바 세상을 바라볼 수가 없다는 거였다. 어떻게든 현실과 불리된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이 그렇게 꿈을 꾸며 살아가는 녀석이였다. 하지만 그의 꿈꾸는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샌가 녀석은 꿈이란 것을 전혀 꾸지 않는다 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드러누워버려 몇시간이고 잠에 빠지길 기다렸지만 잠에 빠져버리는 경우에라도 마치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듯이 그렇게 암흑만이 찾아온다고 했다. 녀석은 나름대로 상상력의 결여라고 결론지어버리고 그런 노력을 포기해 버렸다. 그 이후 녀석은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화해 갔다. 예전부터 알아오던 모습이 아닌 계획과 설정으로 획일된 다른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나.. 2007. 3. 28.